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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Apr 25. 2023

고발성 글로 시작해서 참회로 끝나기까지

덜 싸우고, 덜 미워하며 지내기 미션은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

제목을 보는 순간 마치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홀린 듯 몰입해서 읽게 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마음에 안 드는 남편 때문에 속앓이 하는 전국의 여성 동지들에게 자비없이 얼음을 때려 박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청량감과, 치열한 싸움 끝에 역전승을 거둔 듯한 통쾌함을 선사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에 나오는 고리타분한 이론도 아닌, 절대 행동 변화를 촉구할 수 없는 잔잔한 말투도 아닌, 다소 거칠더라도 비 정제된 언어(사실 평소 내 말투)로 현실을 가감 없이 담아내고 싶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고 싶었다고 할까? 아무튼 나처럼 마음의 고질병을 달고 사는 이들을 다독여주고, 조금이라도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참고로 이전 저서명은 <엄마는 혼자 있고 싶다>이다. 일명 '마음의 소리' 시리즈로, 결혼 후에 겪었던 각종 밑바닥 경험을 담은 생활밀착형 실용서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다음은 <밥 하기 싫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나름 고수하고 있는 키워드는 '공감'과 '위로'이다.)


왜 하필 '남편'을 주제로 한 글을 쓰게 된 거냐고 누군가가 물었다. 몰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소설<82년생 김지영>이 영화화되었을 때, 남편 역할이 공유라는 비 현실적인 설정을 보며 홀로 분개했었다. 아니, 남편이 공유라고? 진심으로 귀를 의심했다. 매일 공유를 보고 살면 앓던 중증의 우울증도 완치될 판에,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나라면 매일 업고도 다니겠다며, 몰입이 1도 안된다며 딴지를 걸어 대기 바빴다. 최소한 내 남편 정도는 돼야 현실성 있는 거 아니냐며, 내가 직접 치열한 현실을 반영한 ‘결혼 생활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반발심 내지는 투지가 생겼다. 


그리하여 타이틀과 컨셉을 정하고, 아웃라인을 잡기까지 일사천리였다(얼마나 그동안 쌓인 감정이 얼마나 많았으면....). 보통 책이고 글이고 제목 정하는 게 절반인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이디어가 넘쳐나서 탈이었다. 이쯤에서 재미로 타이틀 후보작과 탈락한 사유를 공개해보자면,



<타이틀 후보>


남편 아니고 남(의)편
  - 예전에 히트했던 모 광고 카피 같아서 탈락


남편을 안 사랑하는 중입니다
  - 너무 부정적이라 탈락


이토록 죽도록 미운 당신
  - 나중에 자녀들이 보고 충격 받을 까봐 탈락


남편이 변했다
  - 나도 변했기 때문에 양심상 탈락


결혼의 배신, 남편의 배신
  - 그렇다고 외도를 한 것도 아닌데, '배신' 까지는 아닌 거 같아 탈락


속지 마 연애빨
  - 연애가 아닌 결혼 이후의 삶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탈락


미운 놈 데리고 살기
  - 진심을 담은 거라 마음에 쏙 들었으나, 반대로 생각해 보니 남편이 나에게 '미운 년 데리고 살기'라고 한다면 기분이 나빠서 내가 잘못한 걸로 급 반성. 어찌 되었든 간에 탈락


결혼, 별거 없네
  - 너무 직설적이라 탈락


내가 이러려고 너랑 결혼한 게 아닌데
  - 맞는 말이긴 하나 역시 부정적인 뉘앙스라 탈락


미운 남편 다루는 방법
  - 너무 평범해서 탈락, 대신 글 소제목으로는 사용


당신의 남편은 안녕하십니까?
  - 다소 밋밋해서 전체 타이틀로는 2% 부족해서 탈락, 역시나 글 소제목으로 사용


남편 때문에 돌아버리겠어
  -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끝낼 예정이라 탈락


남편인지, 큰 아들인지, 내가 니 엄마냐?
  - 싸우자는 결투 초대장 같아서 탈락


오늘도 남편과 티격태격했습니다
  - '티격태격' 이라는 단어는 좋지만, 뭔가 조금 심심한 느낌이라 탈락


티격태격 무한반복
  - 싸움의 대상이 부부인지, 연인인지 헷갈릴까 봐 탈락


오늘도 이혼을 꿈꿉니다
  - 제목으로 어그로 끄는 느낌이기도 하고, 너무 센 것 같음. 결론적으로 수위 조절하다 보니 탈락


다시 태어나면 절대 안 당신
  -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서 탈락


내 남편을 고발합니다
  - 유력한 후보 타이틀이었으나, 고민 끝에 아쉽게 탈락



그리하여 나름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타이틀인 <남편과 안 맞는 게 분명합니다>로 낙찰되었다. 뭔가 객관적이면서도 덤덤하면서도 사실을 반영한 타이틀로 제격이었다. 그리고 매사에 영 안 맞는 점이 기정사실이지만, 앞으로 열심히 의지적으로 노력해서 맞춰 나가보려 한다는 그런 뜻을 내포 했다고나 할까? (어째 꿈보다 해몽인 것 같은 느낌이)


이렇게 의욕적으로 첫 삽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질 않아 답답한 고비가 있었다. 독립된 작업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작업실은 바라지도 않고 내 방이라도 있었으면), 매일 일정하게 확보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빠르면 12:30에 하교하는 둘째, 집안일하고 돌아서면 하루가 끝) 가정주부인 나에게는 매일의 피할 수 없는 주어진 미션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주말이나 휴일에 작업을 할 수 있느냐? 나만 바라보는 쓰리이를 매번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새벽기상을 하는 등 좀 더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어쨌거나 그야말로 시간에 허덕이며, 쥐어짜내가며 근근이 노트북 글을 이어온 거에 대해서는 셀프쓰담을 해주고 싶다.


구구절절하게 적어가며 느림보 글쓰기에 대해 핑계를 댔지만, 이런 물리적인 이유를 뒤로하고 가장 큰 원인은 사실 '남편'이었다. 어찌나 한결같이 예나 지금이나 나를 미쳐버리게 하는지... 부부 사이가 나빠질 때면 양심에 찔려서 라도 더 이상 글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동안 본의 아니게 개점휴업 마냥, 시작은 했지만 진전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로 미진하게 지내기도 했다.


더 이상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만사를 제쳐놓고 바짝 텐션을 끌어올려 글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해 5월초쯤 원고 초고를 겨우 완성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러스트가 문제였다. 남편이 일러스트를 담당하고 있는데(또 범인은 남편) 아이패드 비밀번호 분실로 화면이 잠겨버렸고,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애플의 보안 정책상 해결 방법이 없었다. 결국 최후의 방법이었던 아이패드 초기화를 감행했다. 고로 기존의 데이터는 싹 날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상 초유의 사태 발생으로 나도 남편도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부부는 동시에 후유증으로 의욕상실을 경험했다.


또한 남편은 본업이 있기에 가뜩이나 야근 후 혹은 주말을 이용해 틈틈이 일러스트 작업을 하느라 속도가 느려서 답답한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부탁하는 입장에서 마냥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참 난감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2022년 9월에 시작한 글이 무려 8개월이 지난 2023년 5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무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비하인드 스토리이다. 아무튼 다음에는 기필코 일러스트 작가를 꼭 바꾸겠다고 다짐해본다.


글을 쓰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마음속으로 칼을 갈며 화가 난 상태였다가 사건을 객관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나의 잘못도 상당했음을 발견했다. 맨날 상대방을 삿대질하고 지적하기 바빴는데, 알고 보니 내가 더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고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해결을 위해 머리를 굴려보고(남편의 장점 50가지 적어보기 등), 다양한 실험도 해보면서(다정하게 셀카 찍어서 프사 바꾸기 등) 무한 싸움의 반복인 도돌이표 같은 삶을 청산하고자 하는 결의를 다졌으니까. 그간의 다사다난한 결혼생활을 결산해 보고, 치유해 보는 유익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번 글은 주변 사람들의 격려보다는 우려가 훨씬 많았다. 아무래도 민감한 주제여서 그랬나보다. 친정 엄마는 "굳이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기어코 대중들에게 오픈해야겠냐?"는 의견이었고, 친구들조차도 "남편을 대놓고 너무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 아냐?"며 "남편이 불쾌해하지 않아?", "너 이러다가 소박맞고 쫓겨난다?"라는 등 나보다 더 시어머니와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마음을 졸였다. 나름 최대한 사건도, 말투도 순화해서 쓴 건데, 어쩜 좋을까? 그러다 보니 세상 태평하고 당당했던 나 조차도 슬슬 '아 이러다가 진짜 집안 싸움이라도 나면 어쩌지.'라는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첫째, 그렇게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킬 만큼 내가 유명인이 아니라는 점

둘째, 만약 출간이 된다 한들 베스트셀러에 올라갈 정도로 날개 돋친 듯이 팔릴 책은 아니라는 점

셋째, 정작 주인공인 남편은 내 글에 관심이 없어서 여전히 전혀 안 읽고 있으며,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는 점 (오히려 적극적으로 일러스트를 그려주며 힘을 보태는 중)

넷째,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남편이 모든 글을 정독한다 하더라도 쿨하게 넘길 테고,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기에 딱히 반박불가 라는 점

다섯째, 남편의 만행 까발리기로 끝나는 게 아닌, 자아성찰을 통한 자기반성은 물론 화해의 악수를 청하며 끝나는 아름다운 결말이라는 점



다행히도 포털사이트 다음 메인 페이지에 내 글이 종종 노출되어 조회수가 폭발하곤 했다. 후련하다는 댓글, 내 얘기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분명히 나 같은 처지(남편 때문에 돌아버리기 직전)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다음 컨텐츠 큐레이팅 담당자를 포함해서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독자들의 소소한 격려를 받으며 힘을 낼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글을 보는 이들에게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라는 공감을 선사했기를. 그리고 배우자를 더 이해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 조금이나마 실질적인 팁과 용기를 주었기를 바란다.


물론 외벌이 입장에서 쓴 글이라 맞벌이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 때문에 겪는 심리적 어려움은, 맞벌이 외벌이의 차이가 아니라 '(아내에 비해 남편은) 애초에 덜 떨어진 존재'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기에(전국의 남편들에게 미안합니다만, 인정해주십쇼!) 그래도 상황의 차이를 어느 정도 수긍해 줄 거라 믿는다. 


생각해 보니 2021년 12월에 첫 책 출간 이후 1년에 책 1권은 쓰겠다고 분명 호기롭게 큰소리쳤었다. 하지만 그 후로 아무런 결과물이 없었기에 어느새 초조해졌다. 이런 한량 같은 작가라니, 부끄러웠다. 앞으로는 띄엄띄엄 글을 쓰는 습관을 청산하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작업을 해보기로 다짐해 본다. 앞으로도 쓸 내용은 무궁무진하니까.




누군가 내게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네, 저는 행복해요! 그것도 엄청."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전히 남편 때문에 감정이 상하고, 입을 닫아 버리는 순간이 있지만 그래도 내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던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제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를 한결같이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녀들이 있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남편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앞으로 사랑해보려구요."

(아직 100%는 아니지만, 앞으로는 그래보겠다는 의지를 담은 답변)


짜증 나게도 근사한 곳을 알게 되면,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게 되면 또 남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데이트를 위해 남편이 기꺼이 연차를 써 준다면 '언젠가는 저곳을 남편과 함께 가 보리.'라고 생각하며 찜 해둔 곳들이 점점 늘어난다. 아, 이건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반응과 같은 원리인가 보다. 결혼 전에는 오직 나 밖에 몰랐는데 이제는 싫으나 좋으나 배우자의 존재가 늘 마음속에 함께 하는 걸 보니.


동문서답은 기본이요,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알아듣는 사오정 같은, 그야말로 매력 터지는 내 남편. 취향도, 성격도, 취미도 달라도 한참 다른 내 남편. 착한데 안 착하고, 자상한데 안 자상한 도통 알 수 없는 내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람이라 고맙고, 부족한 나를 참고 견뎌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앞으로 덜 싸우고, 덜 미워하며 지내기로 약속해 본다. 확 그냥 큰 맘 먹고 더 사랑해 버리겠다고 다짐해 본다. 부디 이 열심히 오래오래 가길.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언행으로 나를 자극하지 말아 주기를, 진심으로 부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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