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을 끓여주는 스윗한 남편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나요?
평소에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는다. 나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다. 어차피 그 돈이 결국 우리 돈이지 않던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값비싼 선물을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거고(이건 연애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이야 오죽하겠는가), 하다못해 어지간한 케이크도 몇 만 원은 우습게 넘다 보니 기념일을 챙긴다는 게 생각보다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다.
게다가 받은 만큼 또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기에 상대방의 기대감에 부응하려면 여러모로 에너지가 들고 골치가 아프다. 그리하여 '서로의 편리성'과 '합리적인 가게 운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생일에는 미역국에 고기반찬 정도로, 결혼기념일에는 외식을 하는 수준에서 소소하게 특별한 날을 기념한다. 암묵적인 합의하에 지금까지 적정선에서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기념일을 보낸다.
때는 지난 2월 말, 내 생일이 다가오던 날이다. 그래도 나름 기념일인데, 뭐라도 특별했으면 하는 헛된 바람이 마음속에서 꾸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명히 내 생일은 평일과 별다를 것 없이 지나갈 것이 뻔했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남편과 아이들이 "Happy Birthday"가랜드를 달아주는 정도? 늘 그래왔듯이 선물을 제대로 챙겨줄 리도 없고, 케이크도 또 그저 그런 걸로 적당히 때울 것이 분명하다.
뻑적지근한 생일파티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녹차케이크만큼은 실컷 먹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생겼다. 평소에 비싸서 조각케이크로만 가끔 먹었기에 내 생일만큼은 눈 딱 감고 홀케이크를 당당하게 사 먹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생일'이라는 명분 하에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고, 가고 싶은 곳도 가고, 갖고 싶었던 것도 갖는 등 죄다 야무지게 챙겨야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얼떨결에 촉발된 <내돈내산 셀프생일 준비>
#part 1_생일 케이크
분명 집 근처 용산에 오** 매장이 있긴 했지만, 봄방학 중이던 아이들과 부대끼고 있느라 이 마저도 잠시 짬을내서 다녀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글픈 마음이었지만 이성을 챙기고 방법을 찾아보니 아하! 온라인으로 구매가 가능했다. 그것도 너무 쉽고도 어이없게 쿠* 새벽배송으로 말이다. 참 좋은 세상임을 다시금 실감하며, 계획대로 녹차케이크를 차질없이 준비했다. 진득한 녹차와 초코 맛이 아주 황홀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내년에도 또 이걸로 먹어야지!) 남편이 눈치껏 대충 사온 케이크에 비해 100배 정도는 감동적이고 맛있었다고 하면 서운해하려나?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란 말 인가. 이 날 케이크는 살찔 걱정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다.
#part 2_생일상
아내를 위해 정성껏 생일상을 준비하고 미역국을 끓여주는 그런 자상한 남편은 안타깝게도 내 팔자에는 없다. 지금까지도 그런 일은 없었고 미래에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우리 집에서 밥은 언제나 그랬듯 늘 나의 담당이니, 군소리하지 않고 미역국을 끓였다. 매년 가족들 생일은 물론, 본인의 생일 조차도 직접 미역국을 끓여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의 분노감이 들었다.
부엌 노동을 최대한 줄여봐야 겠다는 일념으로 머리를 굴렸다. 국거리 소고기를 사서 핏기를 제거하고, 한참 끓여서 기름기를 걷어내는 번거로움을 생략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 바로 냉동실의 갈비탕을 집어 들었다. 여기에 미역만 달달 볶아서 넣어서 푹 끓였더니 스피드 하면서도 매우 그럴듯하게 미역국이 완성되었다. 생일상에 빠질 수 없는 고기반찬도 역시 쿠* 새벽배송에 맡겼다. 그것도 양념도 다 되어있는 걸로. 생일자가 아침부터 부엌데기로 시달리기 싫으니 최대한 간편하게 해결했다. 냉장고에 있던 야채들 탈탈 털고, 견과류도 곁들여 샐러드도 준비하니 그래도 생일상 구색은 갖췄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훌륭해! (김치 하나 꺼내 놓지 않은 초심플한 생일상. 미역국만 있으면 되니까.)
#part 3_생일 선물(식탁과 앞치마)
엄밀히 말하면 '나를 위한 것' 이라기보다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다. 고로 아주 타당한 소비라는 점. 세라믹식탁은 강한 내열성 덕분에 뜨거운 냄비도 별도의 받침대 없어도 될 뿐만 아니라 스크래치와 얼룩에 강해 기존 원목 식탁에 비해 관리도 쉽고 위생적이다. 게다가 음식 사진도 더 잘 나온다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평소에 요리가 취미라 인스타에 자주 집밥 사진을 올리는 나로서는 꽤 매력적인 조건 중 하나이다.) 하루에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근무지이다 보니 세라믹 식탁에 대한 열망은 날로 커져갔다. 다만 높은 비용과 구매할 타이밍이 늘 구매를 가로막았을 뿐. 하지만 때마침 연말정산도 제법 쏠쏠하게 들어왔겠다, 내 생일 선물이라는 당당한 핑계도 생겼으니 더 이상 구매를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확 질러 버리자!" 의자는 전에 사용하던 것을 쓰기로 하고 식탁만 구매하는 걸로 했다. 온라인으로 찾아보니 의외로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유명 브랜드의 식탁 의자 세트는 100만 원은 기본이다.) 정확하게 189,770원으로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뤘다. 배송료까지 포함시켜도 20만원 초반으로 꿈에 그리던 세라믹 식탁을 영접하고, 덕분에 지금까지 행복한 매일을 보내고 있다.
가족과 공용으로 사용하는 식탁 말고, 오롯이 나를 위한 작은 선물도 하나 슬쩍 곁들였다. 부엌데기의 작업복, 바로 앞치마 말이다. 얼룩이 심해져서 애정하는 앞치마를 눈물을 머금고 처분했던 터라 그렇지 않아도 하나 필요했던 참이었다. 생일기념 5천 원 할인쿠폰도 야무지게 사용했다. (이렇게 구차하게 할인 받은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자꾸 돈을 써서 양심에 찔리기 때문인 거, 맞다.) 색깔도 디자인도 재질도 본인의 취향을 온전히 반영하여 직접 고르고 직접 결제한 식탁과 앞치마는 만족도 200%였다. 딱히 쓸모가 없거나,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남편의 선물을 받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것보다 현명하고도 탁월한 생일선물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역시 생일선물은 셀프구매가 정답이로구나.’ (추가로 덧붙이자면, 전에 잘 사용했던 원목 식탁은 중고거래 나눔을 통해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part4_생일 파티 포토존
요새 애들 느낌 좀 내고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서랍에 안 쓰고 아껴 둔 파티 소품들이 있었다. 예전에 온라인쇼핑몰에서 어떤 물품 구매를 했을 때 사은품으로 하트풍선과 파티커튼이 딸려왔었다. 오호라, 오늘 빛을 발할 때가 왔구나! 나중에 아이들 생일 때 사용하려고 했던 건데, '늬들도 늬들이지만 나도 소중하지 않겠니?'라는 심보가 발동해서 확 선점해 버렸다. (미안하다 얘들아, 나중에 필요하면 사줄게.) 어쨌거나 그렇게 탄생한 생일파티 포토존은 뭔가 흥겨운 기분도 나고 제법 괜찮았다. 인증샷도 빠질 수 없어서 평소에 잘 안 찍는 남편과 투샷도 기분 좋게 남겼다. 이게 뭐라고, 별거 아닌 일에 우리 집은 축제 분위기였다. 사진을 찍으며 아이들도 재미있다고 깔깔거리고, 사진을 찍히는 우리 부부도 덕분에 오래간만에 마음껏 웃었다.
#part5_생일 카드
이 부분은 아이들에게 맡겼다. 평소에도 뭔가 꾸미기를 유독 좋아하는 딸이 진두지휘했다. 비록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만들어서 당일에 짜잔~ 하고 보여주는 서프라이즈 생일카드는 아니었지만. 약 일주일 전부터 짬짬이 남매가 회의를 거듭하며 카드를 꾸미는데,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참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중간중간 나에게 얼마나 자랑이 하고 싶었던지, "엄마, 벌써 이만큼 했는데~ 맛보기로 잠깐 보여줄게요."라며 수시로 중간보고를 해대는 덕분에 내용은 이미 거의 파악 되었다는 게 흠이랄까.
아무튼 카드에는 거의 엄마를 찬양하는 듯한 내용이 가득했고, 각종 쿠폰에 그림까지 알차게 구성되어 있었다. (답장 쓰는 란까지 친절하게도 만든 딸의 엉뚱함이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형 카드도 내밀었다. 딱 봐도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고, 알록달록 무지개 빛깔로 정성껏 색칠한 대형 카드는 식탁 벽면에 붙여주었다. (그래, 늬들이 남편보다 훨씬 낫다!) 지금까지 헛 살지는 않았나 보다. 이렇게 부족하고 못난 내가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동 그 자체였다. 한참을 그리고 색칠하며 완성된 생일 카드. 분발한 두 아이들에게 박수를!
#part6_생일 기념 여행 (당일 캠핑)
이전에도 내 생일쯤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물론 생일 기념으로 간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애들 봄방학 기간이라 얻어 걸린 거였다. (남편은 늘 이런 식이다. 5년 전 지금 살던 집으로 이사 왔을 때는, 생일 기념으로 집을 사준 거라나 뭐라나...) 어찌 되었든 나중에 돌아보니 생일 기념 여행은 두고두고 좋은 추억이 되긴 했다. 그래서 행복했던 당시의 순간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여행 도전! 하지만 두 다 전에 제주 여행을 다녀왔던지라, 어디 멀리 다녀오자니 여행비 지출이 부담스러웠다. 남편의 바쁜 회사 일정도 한 몫 했기에 <당일치기 캠핑>이 제격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언제나 아이들이 최우선 순위인 남편에게 설득력 있게 호소하기 위한 작전도 펼쳤다.
"여보, 애들 곧 개학인데 봄방학 끝나기 전에 찐한 추억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데... 날씨도 제법 따뜻해졌으니 우리 캠핑 한번 다녀오면 어떨까? 시간 내기 어려우니 당일치기로!" (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내 생일 기념으로 실컷 고기나 좀 먹고 오자'라고 외쳤음) 역시나, 아이들을 앞세우니 작전 대 성공이었다. 매일 연 이은 야근으로 업무에 허덕이는 남편이 이 날 만큼은 과감하게 하루 연차를 냈다. 이제 남은 건? 신나게 먹고 놀고 오는 일!
탁 트인 자연을 바라보며 숯불에 구워 먹는 삼겹살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고기는 언제나 옳다'는 명언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눈을 아리게 하는 연기와 싸우며 최선을 다해 고기 굽느라 열일해 준 남편에게 이때만큼은 참 고마웠다. 마시멜로 구이, 소시지 구이, 핫초코, 군고구마, 어묵탕, 부대찌개를 차례대로 야무지게 먹고 만족스러운 생일 특집 먹방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자고로 여행은 먹으려고 가는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내 먹다가 끝난 캠핑)
#part7_생일의 진짜 주인공을 찾아가는 서비스
'꽃' '빵', '책'.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다. 생일주간에는 봄의 기운도 느낄 겸 화려한 꽃을 사야겠다 싶었다. 꽃집에 들어서니 역시나 시선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꽃들이 한가득이었다. 어떤 꽃을 골라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던 찰나 문득 친정 엄마가 떠올랐다. '아 우리 엄마도 꽃 참 좋아하시는데.' 좋은 건 나눠야 제 맛 아닌가? 후리지아 한 다발과 롤케이크를 사서 그 길로 친정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좋아하시는 엄마를 보니,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천하길 잘했다 싶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어른이 되기까지 그 많은 수고와 헌신으로 키워 주셨을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니 참 감사했다. 그리고 여전히 어린아이 같이 '생일은 내가 주인공이야'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이 부끄럽기도 했다. 앞으로 생일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날로 바꿔야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내돈내산 셀프생일> 대 장정의 마무리는 진짜 생일의 주인공인 친정을 방문하며 훈훈한 분위기 속에 막을 내렸다.
이렇게 세상 어디에도 없던 셀프 생일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아들 녀석 왈,
“엄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모든 걸 자기가 직접 사고, 직접 준비해도 되는 거예요? 이거 반칙 아니에요?"라며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응, 좀 웃기지? 근데 이런 생일도 있어. 깜짝 놀라게 하고 몰래 선물 준비하는 그런 생일도 있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다 해보고 싶었어."
"아 엄마는 역시 서프라이즈를 싫어하는 ESTJ구나!"
(아들아, 그렇다고 깜짝 선물을 앞으로도 하지 말란 건 아니다.)
아무리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면서 준비했어도, 생각해 보니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꼴이지만, 그래도 참여해준 쓰리이에게 고맙다. 애들 다 키워 놓고 언젠가는 생일 기념으로 남편과 오붓하게 크루즈 여행 떠나는 날을 꿈꿔본다. 물론 그때도 여전히 툭툭거리며 적당히 싸우고 있을테지만. 그리고 결국 내가 항공부터 숙박까지 다 혼자 알아보고 예약도 셀프로 해야 할 게 뻔하지만. 딴 건 필요 없고, 그때까지 부디 두 다리가 멀쩡했으면 좋겠다. 아, 또 하나! 여행용 통장 하나 마련해두자고 남편에게 요청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