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고운 Mar 13. 2023

커플 운동은 개뿔!

로망은 로망일 뿐, 현실부부에게는 불가능한 미션인 걸로

"오늘 저녁에는 같이 동네 한 바퀴 뛰고 올까?"

라는 나의 제안에 남편은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달리기만큼은 선배이기에, 한 수 배워 볼 참이었다. 아무리 바쁘거나 궂은 날씨에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1시간 이상 달리고 올 정도로 꾸준하게 운동을 하는 남편을 보며 늘 부러웠다. 예전보다 훨씬 탄탄해진 체력은 물론 한결 날씬하게 변한 모습에 자극이 되었다. 끽해야 10~15분 정도 겨우 뛰고서 헥헥 거리는 지긋지긋한 저질체력을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운동을 하면서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에 좌절하며 한계를 느끼고 한참동안 운동을 쉬고 있던 찰나였다. 같이 운동을 할 정도로 남편과 평소에 사이가 좋을 리가 없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다 보니 부득이 굽신거릴 수밖에. 최근 <오늘부터 나를 돌보기로 했습니다>와 <마녀체력>이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운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대로 받은 터였다. 마음속에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달리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체력 증진'과 '체중 감량' 두 가지 목표를 이번에는 결단코 달성하겠노라! 


속으로 칼을 갈며 날씨가 풀리기는 봄이 오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이런 나의 비장한 의지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돌발 변수들이 연이어 터졌다. 일단 3월 첫 주는 전무후무하게 내내 몸살로 골골대고 말았다. 하루이틀 고생하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회복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동안 당연히 몸과 마음의 상태는 바닥을 찍었다. 자신만만하던 그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한 주를 날려버리고 그나마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릴 즈음,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미세먼지가 몰려왔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참 다양하게 나를 공격해 댔다. 요 며칠은 환기도 못한 채로 보냈을 정도였기에 도저히 바깥에서 운동이 불가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좌절을 겪었다. (전국의 미세먼지 현황을 보며 심각하게 다시 한번 강릉으로의 이주를 고려했다. 서울 경기가 온통 뿌옇게 난리여도 강원도 쪽은 그나마 괜찮았기에, 적어도 야외 운동 하는데 날씨 지장은 덜 받을 테니 말이다.)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무기력함을 느꼈지만, 심기일전하여 슬슬 홈트로 몸에 시동을 걸어봤다. 물론 홈트도 좋았지만, 좀 더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운동 효과가 있는 달리기가 어찌나 하고 싶던지. 그렇게 호시탐탐 밖으로 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찰나, 드디어 반가운 단비 소식이 들렸다. 새벽부터 오랜 시간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찬 바람이 유입되면서 골칫거리였던 미세먼지가 속 시원히 싹 씻겨 내려갔다. '아 드디어 오늘이다! 이제 달릴 수 있겠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게다가 일요일 저녁은 축구에 진심인 호비남매가 TV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를 시청하는 날이다. 내용에 푹 빠져서 즐기는 애청자이기에 이 시간만큼은 우리 부부에게는 자유가 생긴다. 일요일 저녁 7:40~9:30, 그야말로 골든타임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절로 광대가 승천했다.


서둘러 저녁식사와 집안일을 끝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파트너십을 십분 발휘하여 나는 요리와 뒷정리를, 그동안 남편은 청소와 걸레질을 정신없이 해치웠다. 식사후 남편이 설거지를 할 때 약간의 삐걱거림은 있었으나(이 에피소드는 뒤에서 다루겠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산적해 있던 일을 마무리했다. '의기투합하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이거 시작이 좋은데?' 라며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었는데... 이토록 '달리기 좋은 적당한 기회'를 집 나선 지 5분도 안 돼서 날려버렸다면 믿을 수 있을까? 운동도 운동이지만,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의지적인 결단 중의 하나였다.


"달리기는 말이야, 일단 천천히 뛰는 거야. 처음부터 빨리 달리려고 하지 말고 일단 이 속도로."라며 남편의 훈수는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언덕에 있어서 한참을 내려가야만 평지가 나온다. 내리막길인데 벌써부터 뛰라니, 내 소중한 무릎 연골은 어쩌라고! 남편의 조언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는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응, 책에서 봤는데 일단 초반에는 걷기부터 시작하래. 몸에게 '나 이제 뛸 거니까 슬슬 준비하고 있어'라고 신호를 주는 게 먼저라더라고. 나같이 초보 러너는 일단 5분 정도는 걷는 게 필요할 것 같아. 그리고 그 조언은 이미 전에도 한 다섯 번은 했었어."


아, 지금 와서 돌아보니 내가 좀 까칠하긴 했다. 잘못한 거 인정! 달리기 스승으로 모신다면서 첫 대화부터 이토록 방어적이였다니. 아무튼 초반부터 현실 부부의 대화는 위태로웠다. 이후의 대화가 평화로웠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왜 하필 이때 나는 남편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설거지에 대한 지적질을 시작했을까? 이 날 저녁 메뉴가 스테이크였는데, 생고기를 마리네이드 했던 쟁반부터 설거지를 시작으로 컵, 접시, 도마를 거침없이 세척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게다가 접시에 잔뜩 있던 고기의 기름기를 휴지로 닦아내지 않은 채 설거지라니, 당연히 영 거슬릴 수밖에. 설거지는 본인이 하겠다고 절대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를 했음에도 굳이 본인이 나서서 해대는 바람에 말리지도 못했다. 일단은 빨리 운동하러 나가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어쩄거나 나는 아까 당신의 설거지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왜 내가 그 모습에 화가 났었는지에 대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세균의 위험성에 대해, 교차 감염 등등에 대해 말이다. 아무리 차분하게 조곤조곤 말을 하려 애썼지만, 잔소리는 잔소리였나 보다. 남편은 중간중간 딴지를 걸어 대는 건 기본이요, 말도 안 되는 말대답을 따박따박 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확히 세균 이름이 뭔데? 찾아볼까?"

(내가 무슨 생물학 전공자도 아니고 세균명까지는 잘 모르거든)


"응 뭐라고? 안 들리는데?"

(귀가 시려워서 후드티의 모자를 벗기는 싫다고 버티는 남편에게 바짝 다가가서 귀를 붙들고 이야기했다. 아마 누가 뒤에서 봤으면 머리끄덩이 잡고 있는 줄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


"주방세제로 다 씻겨져서 문제없어. 내가 지금까지의 너의 설명을 반박하는 증거를 찾아서 보내줄께."

(하아... 더 이상 대화 불가. 인내심 고갈)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내가 먼저 폭발해 버렸다. 아,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껄. 같이 운동하기로 한 우리 부부에게 영 부적절한 대화의 주제였다. 지적한 것에 대해 잘못을 좀 인정하고 "어, 알겠으니 다음에 설거지할 때는 조심할께."라는 한 마디가 그렇게도 힘들던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끝까지 내 말을 인정하지 않고 태클을 거는 모습에 더 나도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같이 운동은 개뿔, 앞으로도 남편이랑 같이 운동하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잠깐, 우리 따로 운동하자. 도저히 당신이랑 같이 운동할 기분이 안 들어. 제발 좀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줄래?" 


결국 갈라서기를 먼저 제안했다. 이 분위기로는 1분 1초도 같이 있기가 싫었다. 단단히 화가 난 나의 모습을 보며 삐진거냐며, 성격 한번 고약하다며 또 깐죽대기 시작했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건 어쩜 이리도 한결같을까. 이에 질세라 나도 모진 말을 내 뱉고 말았다.

"에라이, 상대방의 말도 제대로 이해 못 하는 사회성 부족한 모지리야!"


그렇다, 커플 운동은 그저 로망이었다. 16년 차 현실부부에게는 역시나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갈라섰다. 나는 분을 삭이며 진짜 딱 동네 한 바퀴만 돌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지만, 남편은 약 15km를 가볍게 달리고 유유히 복귀했다. 한강대교에서부터 반포대로까지 완전히 한 바퀴를, 그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이다. 난 언제쯤 이 사람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여러모로 참패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을 추스르며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찬찬히 반추해보았다. 그리고 시사점과 대처 방안을 모색해 보았더니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남편의 특징 및 시사점>


1. 유독 상대방의 지적이나 싫은 소리를 참 듣기 싫어하는 편이다.

(고로 갈등의 불씨를 지피지 말자. 최대한 잔소리를 줄이는 게 답이다.)


2.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멘탈이 잘 무너지는 편이다.

(말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평정심을 갖고 함부로 거친 말을 내뱉지 말아야겠다. 앞으로는 남편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대화를 하겠노라!)


3. 같이 무언가를 하려는 것 자체가 싸움의 발단이다. 하던 대로 그냥 혼자 하자.

(현실은 로맨틱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겠다. 썸 타는 사이도, 오랜 연인도 아닌 자식 때문에 참고 버티는 현실부부임을 명심하며 상대방에게 의존하지 말고 각자 하는 게 낫다. 그것이 운동이든, 취미 활동이든, 맛집 투어든.)



당시에는 남편이 100%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씩씩거렸는데, 사건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내 잘못도 절반은 있었음을 발견한다. 아 부끄럽도다! 여전히 나는 화도 버럭 잘 내고, 본인 편의대로 판단해 버리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아무튼, 그래도 이렇게 당한 것이 영 억울해서 소소한 복수가 필요했다.



<남편에게 적당히 복수하기>


1. 카톡 프사 변경

싸움이 일어나기 약 6시간 전에 찍었던 사진을 당장 내려버렸다. 마침 이 날 의상이 시밀러룩(similar look)이라 기념할 겸 다정하게 셀카를 남겼고, 둘이 찍은 사진을 의지를 다해 카톡 프사로 변경했다. 싸우고 난 후에 당장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좀 유치하지만 프사를 내리는 것이었다. 짜증이 가라 앉지 않으니 일단 남편의 면상은 치워야 마땅하지 않은가?


2. 걸레 빨기 양보 

일요일 저녁에는 고맙게도 남편이 걸레질을 한다. 하지만 던져 놓은 새까만 걸레는 대부분이 내가 손빨래로 마무리 하는 시스템이다. 집에 들어와서 욕실 한쪽에 쌓여 있던 걸레를 보고 다시 한번 화가 끓어올랐다. 걸레질을 한 사람이 끝까지 마무리까지 하는 게 더 맞지 않던가?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남편이 걸레를 빨아 놓았다. 나이스!)


3. 드라마 시청 의리 거부

최근 넷플릭스의 모 시리즈를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같이 시청하곤 했다. 의리 없이 혼자서 진도 빼지 않기로 동의 하에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리는 더 이상 지키지 않겠 노라 다짐했다. 평소에 무서운 장면을 못 보는 편이라 혼자 밤에 볼 거라 생각지도 못했을 남편의 뒤통수를 친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후련하던지. (낮에 보면 되거든?) 그래서 오늘은 아무리 바빠도 만사를 제쳐 두고 점심을 먹으며 홀로 재미있게 드라마를 시청했다.


4. 좋아하는 옷 건조기 돌려버리기

사실 이건 전혀 의도치 않았던 일이긴 하다. 건조기에 넣을 빨래를 구분하다가 실수로 남편의 남방을 넣고 말았다. 건조기에 들어갔다 나온 남방은 원래도 남편에게 조금 타이트했는데, 더 작아지고 말았다. 허탈한 표정으로 이제 네가 입어도 되겠다며 양보하는 그 모습이란. 아, 이렇게 계획에 없던 복수가 하나 추가되었다. 신난다.



운동을 같이 해보겠다고 집에서 8시 5분에 나가서 30여 분 만에 초고속으로 다시 집으로 복귀하는 걸로 어이없게 이 날의 일정이 마무리되지만 또 생각해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도 있었다.

 


<조기 귀가가 다행인 점 3가지>


1. 책을 손에 쥐고 돌아옴

집 근처 지하철역에 있는 스마트도서관에 예약한 도서가 생각났다. 예약일 만기가 되기 전에 대출 했어야 하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우연 치고는 하필 알랭 드 보통의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라는 게 좀 웃겼지만, 독서를 통해 하나라도 깨달음을 얻을 거라 기대해 본다. 비록 운동은 제대로 못했지만, 오늘의 외출에 소정의 성과는 있었던 걸로.


2. 글감 하나 추가

남편과 싸운 덕분에 글감을 손쉽게 얻었다. 이거 참 의외의 소득이다. 생활 속 에피소드로 이만한 게 없겠다 싶은 마음에 신나게 자판을 두드릴 힘이 났다. 다음에는 "이렇게 했더니 사이좋게 남편과 잘 지냈어요!"라는 성공담도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3. 이른 기상 패턴 회복

원래대로라면 9시 반쯤 집에 돌아왔을 테니 아이들 잘 준비시키고, 10시는 넘어서 겨우 씻고 걸레도 빨아야 하니 아무리 빨라도 11시는 돼야 잠을 잤을 것이다. 아니지, 드라마까지 봤다면 12시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할 기분이 도저히 들지 않은 터라 집에 빨리 와서 애들 재우며 같이 잠들었다. 예상보다 이른 취침으로 자연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요새 고질적이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게으른 패턴을 한 방에 청산했다. 허둥지둥 아이들 등교를 준비하던 지난주와 달리 오늘은 여유가 있었다. (비록 남은 에너지로 아침부터 굴라쉬를 끓였다는 게 흠이지만)



한 강의에서 김창옥 강사가 던졌던 명언이 생각났다.

"남편을 너무 사랑하려 애쓰지 마라. 그래 봤자 끝은 공황장애더라.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 그만이다." 


명언 중의 명언 아닌가? 앞으로도 남편 때문에 속앓이 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될 터이니, 좋은 관계를 위해 너무 애쓰지 말고 적당히 지내야겠다 싶다. 단,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겠노라 마음을 다스렸다. 그나저나 어젯밤부터 화가 나서 남편에게 입을 꾹 닫고 있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여지도 없이 아이들과 벌어진 에피소드를 메세지로 보내려다 참았더니 손이 근질근질하다. 혼자만 알고 있기가 너무 아까운 웃긴 내용이라서 말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삶의 희로애락을 나눌 사람은 또 결국 남편인가 보다. 이번에도 또 이렇게 얼레벌레 화해하게 되겠구나 싶은 마음에 한편으로는 허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다.


그래, 오늘 남편이 퇴근하고 미안했다고 용기 내서 먼저 말해야겠다. 성격 더러운 아내 만나서 고생이고, 참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이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려 애써도 어쨌거나 결론은,


<같이 운동하기> 미션, 대실패!



(참고로, 이 후에 ‘런데이’라는 앱을 활용해서 꾸준히 달리기 훈련을 하고 있다. 30분 달리기 트레이닝을 완주했고, 이제는 50분도 쉬지 않고 거뜬히 달린다. 종종 달리고 싶어서 새벽같이 기상하여 밖으로 뛰쳐나갈 정도로 러닝에 푹 빠져있다. 어쨌거나 운동도, 운전도 남편에게 안 배우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임을 잊지말자.)













이전 12화 카톡 프사를 남편과 찍은 사진으로 바꾸면 생기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