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은 어떻게 보면 흔하디 흔한 음식이다. 떡볶이를 먹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길을 걷다가도 XX김밥, XX떡볶이와 같은 깔끔한 프랜차이즈는 물론이고 시장이나 포장마차처럼 소박한 곳까지, 비록 매장 모습은 다르지만 어딜 가나 떡볶이는 항상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마트의 사정도 별 다름없다. 레토르트, 밀키트 등 무엇을 골라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해야 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가 있다. 국물 떡볶이, 짜장 떡볶이, 쫄볶이, 라볶이, 매운오뎅떢볶이 등 기호에 따른 선택의 폭이 꽤나 넓다. 심지어 편의점에서는 컵라면 형태로의 전자렌지로 조리할 수 있는떡볶이도 있다. 이처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이 바로 떡볶이이다. 배달앱의 떡볶이 종류는 더욱 화려하다. 우삼겹 떡볶이, 치킨+떡볶이, 로제떡볶이, 핫도그 반반 떡볶이, 마라떡볶이 등등 거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떡볶이가 있다. 나 말고도 떡볶이에 진심인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어느 동네를 가든, 그 지역의 유명한 떡볶이 집을 찾아가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렇게 나만의 떡볶이 맛집 지도가 완성되어 가는 게 인생의 낙이다. 마치 간증이라도 하듯 주변 사람들에게도 어디가 맛있더라, 그 가게에서는 꼭 이렇게 주문해야 한다, 사람이 많이 몰리니 무조건 11시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등의 깨알팁을 신나게 전수하곤 한다.
하지만 그토록 좋아하고 아끼던 떡볶이 맛집을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 주인장이 노쇠하여 건강상의 문제로 문을 닫는 경우였다.
'아, 이 집의 떡볶이 비법을 전수받았아야 하는데!'
'여기가 문을 닫다니, 이건 국가적인 손해라고.'
'이제 도대체 어딜 가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이 맛을 다시 느낄 수가 없다니, 믿을 수가 없어'
등등 마치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탈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발길을 돌렸을 때의 그 헛헛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아 떡볶이집도 예외가 아니구나 싶어 그저 속상하기만 했다. 상도동의 오시오 떡볶이가 그러했고, 자양동 노룬산시장의 노룬산분식이 그러했다.
먼저 오시오떡볶이는 혼떡하기 좋은 동네 맛집이었다. 남들은 일부러 맛집 탐방으로도 오는 곳인데 나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니, 이른바 떡세권에 살 수 있는 내 처지가 이토록 감사할 때가 없었다. 여기는 떡볶이, 꼬마김밥, 야끼만두 딱 세 개뿐인 단출한 메뉴에 테이블도 몇 개 없는 매장. 재료가 소진되면 3시, 4시에도 영업이 끝나고 계산은 오직 현금만 받아주는 곳. 참으로 도도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시오의 노예 마냥 "부디 한 그릇 먹게만 해 주십시오, 뭐든 하겠나이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여느 녹진한 빨간 시장 떡볶이와는 달리 넉넉한 국물에 색깔도 영 맹숭맹숭해 보인다. 하지만 국물을 떠서 후루룩 한 입 먹어보면 편견이 와장창 깨진다. 마음에는 평화가, 입가에는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맛이랄까? 떡과 어묵을 목에 넘기는 순간만큼은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단 말인가.
고명으로 올라간 대파 외에는 양파, 양배추 등 그 어떤 야채도 없는 순수한 떡볶이. 튀김도 오직 야끼만두 딱 하나만 취급하는 소신 있는 곳. 아마도 떡볶이에 자신이 있으니 다른 메뉴에는 크게 신경 안 쓴 게 아닐까? 특별한 기교 없이도 어떻게 이런 청순한 맛이 나는 건지, 먹으면 먹을수록 연구 대상이었다. 집에서도 그 맛을 흉내 내 봤지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오시오떡볶이는 심플하면서도 영혼까지 홀리는 그런 떡볶이였다.
"건강상의 문제로 당분간 쉽니다"
가게 앞에 붙어있는 한 장의 메모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 무슨 일이 생기셨구나, 빨리 회복하셔야 할 텐데...' 진심을 담아 주인장의 복귀를 고대했다. 한 달, 두 달, 세 달...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가게 근처를 지나가게 되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영업을 재게 했는지 살펴보는 게 일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매번 굳게 닫힌 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기다려 보겠노라고, 군입대한 남자 친구의 제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거의 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주인장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희망고문이 이리도 힘들 줄이야... 보통은 가게가 문을 닫으면 다른 매장으로 바뀌기 마련인데 몇 년을 문을 닫은 채 그대로인걸 보면 건물주 임에 틀림없다는 엉뚱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다가 영영 다시 먹을 수 없게 된다면 어쩌지?'라는 조바심은 어느새 '많이 아프신가 보네, 부디 별일 없으시기를'이라는 간절한 바람이 되었고, 이제는 추억의 떡볶이 맛집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나갈 때마다 눈길이 머무는 걸 보니 여전히 오시오떡볶이의 미련을 버릴 수가 없나 보다.
오시오에 이어 마음에 묻어둔 곳은 바로 노룬산분식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지도앱을 켜고 한참을 헤맸다. 알고 보니 시장 안쪽이 아니라 길가에 있는 바깥쪽을 찾았어야 했다. 기어코 먹겠다는 그 의지가 더욱 간절해져서일까, 이곳에서 맛본 떡볶이와 잡채는 더욱 꿀맛이었다.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분식집은 첫인상부터 정겹기 짝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각 떡볶이철판에 조리 중인 아름다운 떡볶이와 산처럼 쌓여있는 떡볶이 떡이 눈에 띈다. 떡볶이 냄새가 기분 좋게 코 끝을 자극한다. 벌써부터 느낌이 딱 왔다. '와, 여기는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 없겠구나.'
노룬산분식은 분식집답게 메뉴가 정말 다양하다. 냉면, 쫄면, 우동, 라면, 잔치국수, 칼국수와 같은 면 종류부터 계절에 따른 떡국, 떡만둣국, 콩국수까지. 잠시 고민이 되긴 하지만 언제나 나의 선택은 떡볶이와 잡채이다. 처음에는 두 메뉴가 과연 어울릴까 싶어 의아했다. 그 어딜 가도 떡볶이와 잡채를 같이 파는 곳이 없었기에 흔한 조합은 아니지 않던가. 하지만 이런 걱정은 세상 쓸데없는 일이었다.
주문과 동시에 바로 야채와 볶아서 내주는 따끈따끈한 잡채를 맛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거 진짜 2,500원 맞아?' 싶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훌륭한 메뉴였다. 아낌없이 들어간 참기름과 참깨가 이미 후각을 지배했고, 아삭아삭한 야채의 식감과 보들보들하면서도 탄력 있는 잡채의 식감은 가히 예술이었다. 떡볶이 국물에 잡채를 적셔서 먹어보니 분식과 한식의 아름다운 콜라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잡채에 고기 없이 몇 가지 야채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살릴 수 있다니, 참 신기했다. 게다가 단짠 매콤한 떡볶이 맛을 중화시켜 주는 역할을 감당하기에도 훌륭했다. 잡채 맛에 빠져있느라 정작 중요한 떡볶이가 자칫하면 뒤로 밀릴 뻔했다. 그렇다면 떡볶이는 어땠느냐?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은은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아우라가 있었다. 너무 맵거나, 너무 달지 않고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그야말로 우아한 맛이었다.
이 맛에 반해 한동안 노룬산분식을 들락날락거리며 맛을 음미했었다. 마음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친절한 주인부부의 응대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근처 유료주차장이 만차였을 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눈 딱 감고 잠시 길가에 주차를 했다가 주차위반딱지도 받아본 쓰라린 경험도 있다. (아, 범칙금이면 떡볶이가 몇 그릇인데 아까워라! 그래도 내가 잘못한거니 다음에는 절대 불법주차는 안하는걸로)
아무튼 추억의 두 떡볶이 맛집이 있기에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 두 곳의 공통점은 바로 '떡볶이 본연의 소박한 맛'이라는 점이다. 자극적인 맛의 떡볶이는 먹는 당시에는 짜릿하지만 한 번 먹고 나면 속이 불편하거나 한동안 다시 방문할 생각이 안 난다. 오히려 오시오떡볶이와 노룬산분식처럼 투박한 맛이 나중에 자꾸 생각나고 더 그립다.
이제 다시는 갈 수 없는 떡볶이집.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여기의 떡볶이 맛을 볼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싶다. 최소한 못 먹어본 사람들에 비해서는 내가 위너 아닌가! 아무튼 떡볶이에 대한 찐한 나만의 추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떡볶이 명인은 국가 차원에서 보존할 수는 없을까? K-food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떡볶이를 지금보다 훨씬 더 우대해 줬으면 좋겠다. 떡볶이의 가치는 단순한 맛을 넘어서서 특별한 무형의 가치도 분명 존재할 거라 믿는다. 대대손손 가업으로 물려받으면 제일 좋을 테고. 아무래도 조만간 떡볶이 연구소 하나 차려서 전국의 떡볶이 맛집 명인들에게 상장과 상패라도 선사하고, 그 맛의 비법을 전수받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국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사업이 아닐까 싶다. (너무 나갔나? ㅋㅋ)
아무튼, 좋아하는 떡볶이 맛집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한 그릇 하기를 바란다. 그 맛이 사라지기 전에 실컷 먹고 행복을 실컷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 글의 진지한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