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떡볶이는 무조건 매워야 제맛이라고 굳게 믿었다. 떡볶이의 종류가 아무리 다양해진들 오리지널 버전인 '빨간색 떡볶이'만이 진정한 떡볶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맵부심을 가진 건 아니다. 캡사이신이 들어간 떡볶이는 사절이요, 마라탕만 해도 1단계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초등학생 때부터 애지 간한 매운맛을 받아들였을 수준 딱 그 정도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딜레마에 빠졌다. 김치도 적응시키는데 한참 걸릴 정도로 매운맛에 유독 취약한 남매를 보며 '이래 가지고 언제 제대로 된 떡볶이를 먹을 수 있으려나?'라는 마음에 답답했다. 매운맛에 길들여지기까지 한참 걸리는 노릇이기에 때로는 조급하기도 했다. 그동안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던 여타의 떡볶이들도 떡볶이의 범주로 인정해야 하는 건가 싶어 그야말로 '떡볶이의 딜레마'에 빠졌다.
결론적으로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이들에게 '떡볶이의 숭고한 가치'를 어릴 적부터 심어주기 어려울 테니까. 조기교육의 중요성은 떡볶이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그렇기에 떡볶이 조리법을 놓고 치열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고춧가루는 개미 눈곱만큼만 넣고 케첩이나 파프리카 가루로 빨간색 느낌만 흉내를 내보기도 하고, 간장이나 짜장을 베이스로 한 단짠단짠 떡볶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아이들 입맛에 통과되는 게 목표였다.
이렇게 변주가 들어간 '떡볶이 답지 않은 떡볶이'는 뭔가 아쉬움이 늘 뒤따랐다. 같이 먹자니 영 안 당기고, 따로 내 입맛에 맞는 떡볶이도 준비하자니 귀찮고 말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의 간절한 소원이 하나 생겼다. 세계 일주도 아닌, 외국어 완벽 마스터도 아닌, 100억 모으기도 아닌, 참으로 소박하기 그지없는 소원
아이들과 매운 떡볶이를 같이 먹을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는 것
영유아 건강검진이 드디어 끝나는 순간, 가루약은 이제 시시하다며 알약으로 갈아타는 순간, 네 발 자전거를 졸업하고 두 발 자전거를 타던 순간, 동요보다 최신 아이돌 신곡을 선호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매운 떡볶이를 같이 먹는 순간도 찾아왔다. 막연하고도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어느새 꿈이 점점 현실로 되어갔다. 비록 맵다고 중간에 물에 헹궈서 먹는 반칙을 하거나 얼얼한 혀를 진정시켜 줄 음료수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보이는 중이다.
어쨌거나 매운 떡볶이로의 진입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입맛은 여전히 '안 매운 거, 혹은 덜 매운 거'였다. 라면은 순한 맛을, 양념치킨 보다 후라이드 치킨을 고집했으니까. 어느 날은 비교적 순한 맛의 국물떡볶이 밀키트를 산 적이 있는데 자기들도 먹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덕에 곤란했던 적이 있다. 고민 끝에 소스를 반만 넣고 조리 후 아이들에게 대령했다. 눈 딱 감고 나름 큰 배려를 했으니 남김없이 잘 먹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한두 입 먹어보더니 맵다고 항복하며 물러서는 게 아닌가! 남은 소스는 이미 버렸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아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제대로 만들어서 맛있게 먹을걸, 괜히 양보했다 싶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것 봐! 너네 아직 매운 거 못 먹잖아~ 왜 객기를 부린 건데?" 소중한 떡볶이 타임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틀어지니 화가 났다. 따지고 보면 매운 걸 못 먹을 수도 있는 거고,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도 아니었는데...
맵다고 화내서 미안해
나중에 이성을 챙기고 아이들에게 용기 내서 말했다. 그렇다, 떡볶이의 매운맛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무슨 권리나 의무도 아닌데 왜 나는 순간 버럭을 참지 못했을까. 그리고 서두를 필요도 없는 일이지 않던가. 대소변을 못 가리다가도 언젠가는 기저귀를 떼기 마련이었고, 글을 완벽하게 깨우치지 못해도 막상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어련히 한글을 알게 되는 걸 경험해 봤으면서도 말이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인데, 왜 나는 못난 어른처럼 굴었을까?
"나는 너희들만 한 나이 때 떡볶이 잘만 먹었어. 너네는 왜 이렇게 맨날 맵다고 난리야?"라고 말하는 나 자신이 바로 전형적인 꼰대였다. 과거의 나는 나일뿐이고, 현재의 아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라는 법도 아닌데 말이다. "엄마 친구 아들은 1학년 때부터 매운 음식도 다 잘 먹는다더라. 너희들은 대체 언제까지 안 맵게 따로 준비해줘야 하니?" 라며 아이들의 마음을 자극하기도 했다. '입맛'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왜 아이들에게 들이대며 남과 비교했을까? 그리고 분명 나에게도 매운맛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애송이 시절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단지 기억을 못 하는 것일 테고.
어디 이뿐인가? 능수능란한 젓가락질, 스스로 옷 입기, 어른 도움 없이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 막상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이 모든 것들은 하루 아침에 습득된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수십 수백 번을 차근차근 가르치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줬을 때 비로소 터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까짓 매운 떡볶이,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별 일 아닌 일을 가지고 왜 나는 인내하지 못했을까. 인생 선배로서, 떡볶이 선배로서, 여러모로 갑질을 한 꼴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간호사들 사이에 있다는 '태움' 문화 못지않게, 은근슬쩍 매운맛을 강요하며 다그치던 내 모습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조금 느긋하게 아이들을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서 요지부동이던 아이들 입맛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그러니까 12살이 된 아들 녀석은 기특하게도 제법 매운맛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오히려 "에이~ 이 정도면 하나도 안 매운데요?"라고 허새를 부리기도 하니까. 비록 방금 전에 한 말과는 달리 줄줄 흘러내리는 콧물을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반면 3학년인 10살 둘째 아이는 스스로를 '맵찔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매운 반찬도, 국도 여전히 절레절레하는 편이지만 떡볶이만큼은 예외다. 혀를 길게 내밀며 헥헥거리고, "매워~ 매워~"를 연신 내뱉으면서도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끝까지 치열한 젓가락 싸움에 합류하는 걸 보면 진정한 떡볶이의 세계로 입문한 게 분명하다. "아직 매운맛의 매력을 모르네~"라며 딸을 놀려대는 나에게 하는 말, "엄마, 나는 아직 어려서 미각세포가 발달해서 그런 거라니까요." 주눅 들기는커녕 이 위풍당당함은 뭐지? (why시리즈 책으로 다져진 풍부한 상식은 어쩔 때는 어른보다 낫다.)
몇 주 전 오랜만에 가족들과 홍대 앞 길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건물이고, 맛집이고 예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히 변해있었다. 그때 우연히 조폭떡볶이를 발견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게를 보며, 여전히 그 명성을 여전히 유지하는 것 같아 어찌나 반갑던지. 마침 아이들도 배고프다며 간식타령을 해댔다. "그럼 우리 여기서 떡볶이 먹고 갈까?"라는 나의 제안에 아이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맵다고 못 먹으면 어쩌나 싶은 우려도 있었지만, 메뉴에 순대와 어묵 그리고 튀김이라는 차선책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놓였다.
운 좋게도 야외테라스, 그것도 나름 명당을 차지한 덕에 메뉴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윽고 우리 순서가 되어 메뉴들로 한 상 차려졌다. 제법 쨍한 색감의 떡볶이는 의외로 별로 맵지 않았다. 오리려 입에 착착 감기는 양념 맛이 근사하기만 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주춤했지만 막상 시식을 해보니 괜찮았는지 점점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시판 매운 떡볶이를 엄마 아빠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참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이런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남매의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
'아, 이게 가능하다고? 이렇게 아이들과 같이 떡볶이를 먹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그토록 꿈꾸던 순간이 이렇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다니, 마음이 뭉클했다. 물론 전에도 즉석떡볶이 집을 같이 간 적이 있긴 했지만, 둘째 아이는 잔치국수를 먹었기에 네 식구가 완전체로써 떡볶이를 즐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날은 감격스럽게도 다 같이 떡볶이를 먹었기에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렇게도 같이 떡볶이를 먹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너무 빨리 크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의 감정도 교차했다. '그냥 천천히 자라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은 너무 이율배반적이려나. 하여튼 내 마음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 날 우리 가족의 분식집 방문 성적은 아주 훌륭했다. 매워서 못 먹겠다는 엄포도, 음료수를 대령시키라는 요구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더 먹겠다는 걸 말려야 했다. 그동안 매운맛 떡볶이는 어른들의 특권인 것처럼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매운맛을 알아버린 아이들이 우리의 몫을 호시탐탐 노리고, 야금야금 같이 먹는 동지가 되었다. 아, 먹성 좋은 남매의 침범으로 내 몫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잘 먹어도 문제, 못 먹어도 문제로다.
키가 166cm인 나를 일찌감치 훌쩍 뛰어넘은 아들 녀석. 어느 순간 아빠 보다도 더 클 테고, 딸내미도 내 키를 넘어서겠지? 이제 내가 우리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듯하다. 신체적 조건으로도, 먹성으로도 모든 면에서 두 아이들에게 밀릴 거라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우울해진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모든 떡볶이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비록 원하는 맛은 아니었어도 아이들을 위해 달달한 떡볶이를 만들어 먹던 순간부터, 분식집의 자극적인 맛도 무탈히 정복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이들과 떡볶이를 함께 즐겼던 모든 순간이 찬란했음을 깨닫는다. 그 맛이 맵든 안 맵든 말이다. 그 자체로 '행복'이었노라 고백하고 싶다.
앞으로도 아이들과 함께할 떡볶이 타임이 기대된다. 사춘기를 지나는 시기에도, 대학생이 된 시기에도 최소한 떡볶이를 먹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함께이고 싶다. 한창 유행인 신상 떡볶이도, 핫한 맛집도 함께 곳곳을 누비며 그때도 지금처럼 아이들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부록: 아이들을 위한 떡볶이 팁
안 매운맛 떡볶이 집에서 만들기
1. 로제 떡볶이
-로제(토마토+생크림) 소스만 있으면 손쉽게 만들 수 있음
-식감을 돋우기 위해 알록달록 파프리카를 추천
-칼집을 넣은 비엔나소시지가 찰떡궁합
-일반 떡볶이떡도 좋지만 치즈떡과도 잘 어울림
-파마산 치즈+파슬리 가루 토핑으로 마무리
2. 간장 떡볶이
-궁중떡볶이의 변형으로,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먹고 남은 장조림이나 불고기를 활용
-야채는 깍둑썰기보다 채 썰기가 더 예뻐 보임
-치즈떡, 조랭이떡(일명 눈사람떡, 둘째가 붙여준 별명)을 넣으면 더욱 근사해짐
-메추리알을 곁들이는 방법도 추천
-국물이 넉넉하다면 당면을 넣어도 좋음
3. 짜장 떡볶이
-무턱대고 시판 짜장맛 떡볶이를 샀다가 낭패를 본 후 (후추, 고춧가루 등의 첨가로 약간 매운 편) 짜장 가루 혹은 고형을 활용하여 만들게됨
-야채는 식감을 살릴 정도로 적당히 볶아주는 게 관건
-돼지고기 살코기와 야채를 듬뿍 넣어서 완성
-라면을 곁들이게 되는 경우, 라면스프를 살짝 넣어줘야 감칠맛의 완성
4. 김치 참치 떡볶이
-김치는 물에 헹궈 매운맛을 조절하고 작게 다져줌
-김치를 먼저 볶아주는데 이때 설탕을 살짝 넣어야 함(신맛을 잡아줌)
-대파, 참치를 넣고 볶아주고 부족한 간은 액젓으로 마무리
-간이 잘 스며드는 떡국떡과도 잘 어울림
5. 알리오 올리오 떡볶이
-파스타의 떡볶이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됨
-마늘은 올리브유에 충분히 볶아 매운맛을 날려준 후 베이컨이나 햄 혹은 새우(건새우)를 넣고 볶아줌
-소금과 후추로 간을 적절하게 조절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며, 한편으로는 떡볶이의 일탈을 느낄 수 있음
*1~4 메뉴의 공통 사항: 남은 국물에 볶음밥을 만들면 금상첨화! 이때 모짜렐라 치즈를 올려주면 아이들의 환호성이 절로 나옴 ('고객만족의 순간' 이라고 칭함)
안 매운맛 떡볶이 밖에서 사 먹기
전국에 지점이 있고, 메뉴가 다양한 프랜차이즈 떡볶이집을 공략하는게 포인트
1. 두끼 떡볶이
-토핑을 짜장맛으로 선택. 떡볶이 외에도 각종 튀김류, 아이스크림, 탄산음료 등
-떡볶이 외에도 같이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이 많은 편
2. 우리할매떡볶이
-짜장떡볶이가 있음. 게다가 순한맛으로 선택 가능해서 매울 염려 없음
-볼카츠, 치즈롤까스, 핫도그와 같이 일반 분식집에는 거의 없는 다양한 사이드 메뉴가 있음
3. 통인시장 기름떡볶이
-간장맛을 기본으로 한 기름에 볶은 떡볶이로, 아이들도 전혀 무리 없는 맛(물론 매운맛도 있음
-전 세트도 판매하니 떡볶이만으로 심심하면 같이 먹어도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