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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하 Apr 20. 2023

신입 기자의 일생(日生) (5) 술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디오니소스님

니체는 두 명의 신이 우리 삶을 이끈다고 말했다. 한 명은 태양의 신 아폴론이다. 어릴 적 서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을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신 역시 아폴론이었다. 제우스는 수염이 너무 많고, 포세이돈은 너무 파랗고, 하데스는 뭔가 조금 무서웠다. 사실, 어린 내가 롤모델로 삼기엔 셋 다 좀 늙어보였다.


올림포스 산에 출입처를 뚫은 12신 중 3명을 빼고, 기자는 남자아이였으니 자신을 대입하기 어려운 여신을 빼면 몇 명 남지 않는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못생겨서 탈락이다. 대장장이라는 직함도 번개, 바다, 죽음에 비해 너무 격이 떨어지지 않나. 아레스는 무식해서 싫어했다. 헤르메스는 사실상 주요 신들의 심부름꾼으로만 등장하고 있었다. 다소 볼품이 없었다.


아마 니체도 비슷한 사유의 과정을 겪었으리라. 뺄 것 다 빼보니 남은게 공교롭게도 둘 정도가 남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신을 제외하기 구차해진 니체는 "두 명의 신이 우리 삶을 이끈다"고 적었다. 책 제목은 '비극의 탄생'이었고, 니체가 뽑은 다른 한 명의 신은 술과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였다.


기자도 인간이라면, 삼단논법에 의거, 기자의 삶 역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지배한다. 발제부터 취재, 마감의 시간 동안 아폴론의 이성적 시각으로 살아간다. 니체의 말처럼, 아폴론이 쏘아내는 빛으로 세상을 조명하고 밝혀낸 부분을 직시하는 것이 기자의 일상인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디오니소스의 개로 산다.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 책임져."


보통 언론사에는 디오니소스들이 두세명 정도는 넉넉히 서식한다. 토속적인 말로 주신(酒神), 술고래, 싸나이, 술괴, 그냥 개라고도 부른다. 세상의 불합리와 불의를 찾아 헤메던 기자들은 저녁 회식자리에서 마치 파랑새와 같이 세상의 부조리가 자신 곁에 있었음을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신명나게 리라를 치던 오르페우스처럼, 건배사를 외치고, 물개박수를 치고, 목젖을 가득 열어 웃음을 뱉고 술을 부어넣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언론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기자들에게 하등 쓸모없는 동년배의 친구들을 만날 때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해 우리가 서로 독립된 객체가 아닌, 우리 모두 하나의 주체로서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했다. 나는 가끔 신이 아니라 니체가 죽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내 안의 아폴론에게 속삭이는 것이다. "그래도 사주는 술이니 좋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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