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가 뭐랬더라
"1막에서 총을 소개했다면, 3막에서는 발사해야 한다."
체호프의 총은 모든 극에 있어 벗어날 수 없는 공리와 같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봐도 희극일 수밖에 없는 인생은 자연스럽게, 귀납적 논법에 따라 체호프의 총이 가진 법칙에 편입된다. 그 결과가 눈물이든 웃음이든, 우리가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일상 속의 모든 잔가지는 결국 제각기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아침에 발제를 했다면 저녁에는 마감을 쳐야 한다.
기자가 한 순간의 재기로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한 '오늘의 기사 계획'은 점심에는 '엄중한 자아비판'이 되고, 저녁에는 '월급도둑 공판의 증거'가 된다. 하루에 서너편씩 너끈하게 자기소개서를 써내던 글솜씨는 사라지고, 스스로 쓰겠노라 공언한 기사조차 한 줄도 채우지 못하는 무능한 기자만이 남았다.
기자가 되지 않았던 시절, 기자도 다른 기자들을 업수이 여길 때가 있었다. 단편 소설만으로 원고지 50매를 써내는 소설가와, 벼락같은 한 줄의 문장을 위해 피를 토하는 시인들에 비해, 기사는 가볍고 짧고 요행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신입기자에게 맡겨지는 기사의 양은 그것이 스트레이트든, 박스든, 르포든 원고지 10매를 넘지 않는 짧은 글에 불과하다. 하지만 글 꽤나 썼다는 기자에게 형용사와 부사, 비유와 과장을 뺏어가자 놀랍게도 기자는 원고지 한 줄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얼간이가 돼버리는 것이다.
부랴부랴 관련 기사를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이 생각을 뒷받침해줄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모 대학의 관련 전공 교수님과 모 협회의 회원, 하다못해 친구들 가운데 관련 직종에 근무하는 회사원의 말이라도 줏어 담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기사에서 가장 배제해야하는 것은 기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중3도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만을 담아야 한다."
기자는 신입 교육 때 스스로 금과옥조로 새긴 기사 쓰기의 법칙을 되새기며, 뼈아픈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진다. 나 스스로는 결코 사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기자란 어설픈 글 재주를 뽐내기보다 사실의 나열만으로 커다란 하나의 사실을 조립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각의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종종 지나친 자각은 지각을 야기한다. 모 대학 모 교수에게서 간신히 쓸만한 말을 얻어낸 기자는 얼기설기 붙인 통계와 얕디 얕은 수준의 분석 뒤에 따옴표를 치고 면피하듯 제 3자의 발언을 붙여 넣는다. 누군가의 눈에는 글쓴이가 완벽하게 소외된 객관적인 글이겠지만, 기자의 눈에는 무가치한 정보의 반죽 같은 것이 남는다.
'신입'이라는 방패로 간신히 기사를 넘긴 신입기자의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언론사의 성질마다 다르지만 신문지를 발간하는 지면 기자의 마감시간은 인쇄소의 마감시간에 맞춰 오후 경 끝이 난다. 남은 시간은 다음 날의 기사를 대비하는 준비와, 오늘의 무능함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 돼야함에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신입'이라는 방패가 부숴지기 전까지, 기자는 잠시 자신이 기자임을 잊고 취재원도 아니고 어떠한 정보 한 줌도 줄 수 없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린다. 윤전기는 공장 미싱처럼 기자의 슬픔과 관계없이 매일매일 돌아간다. 대장간의 철이 의지에 상관없이 달궈지고 식혀지는 동안 단단해지듯, 신입 기자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의 일생 속에서 단단한 기자로 태어날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자기합리화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