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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May 24. 2023

경마장에서 웃다

20년 지기 친구들과

 우리 파트너님 아들이 대원외고에 들어갔대.

간만에 다같이 함께한 점심 식사 중 승준이 말했다.

 ‘40기’래 벌써.


 2003년 처음 만난 우린 대원외고 ‘20기’다. 하루하루 세라고 하면 못 셀 것 같은 세월도, 되짚어 보니 고작 한 줌의 시간이 되었다.


 그 한 줌을 헤집어 처음과 끝을 나란히 대보면 변한 우리가 보인다.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더 많다는 건대입구역, 만원에 안주를 3개나 주던 싸구려 술집에서 과일소주를 마시던 우리가 이제는 차 없인 갈 수 없는 경기도 어디의 오리고깃집에서 600g에 5만 9천 원 하는 차돌 오리고기를 2번이나 시키고도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희윤의 생일을 핑계로 오랜만에 모인 우리는 많은 놀잇감 중 경마를 택했다. 요새 골프가 유행이라던데 스크린 골프는 어떠냐는 지수의 의견은, 얼마 전 무려 60 오버타를 쳤다는 승준의 경험담 앞에서 금세 시들해졌다. 하루종일 서로의 바보짓을 지켜보는 것이 스크린 골프가 주는 재미의 전부라면, 그런 것쯤 경마장에서도 가능하지 않겠냐 싶었다.


 경마장 경력자 승준의 리드하에,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마도 낯선 곳에서의 우리 존재가 어색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배팅을 위한 OMR 카드와 컴퓨터 사인펜을 손에 든 친구들의 모습이 내 눈엔 몸이 불고 얼굴만 늙었지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감출 수 없는 신난 표정과 들썩거림. 영락없는 그 시절의 우리였다. 사뭇 진지하게 말을 분석하고 배팅하려 해도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수학을 잘해 메일 아이디조차 mathlovesj였던 승준은 서울대 출신 엘리트답게 배당률에 기반한 수학적 접근을 보여주며 경기 초반 압도적 예측률을 뽐내었으나, 몇 판 못 가 끗발이 떨어지자 유튜브 방송을 켜고 유튜버의 의견 대로 배팅하기 시작했다. 그 뒤 승준이 뱉는 말엔 묘한 설득력이 더해져, 유튜브를 보는 그가 7번 말은 나이가 많아서 안된데라고 말하면 모두 7번 말에 엑스표를 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밴드부 드러머 출신으로 음악적 조예가 남다른 지수는 마치 락 페스티벌에 온 사람처럼 신이 나 배팅 결과는 아무래도 좋은 모습이었다. 얼마 전 코첼라에 다녀왔다던데, 지금 지수의 모습이 그때와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흥분한 그는 몇 판을 내리 잃더니 한 판에 오천 원이란 거금을 배팅하는 방식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돈을 잃은 것은 지수였지만 이 날 가장 즐거웠던 사람 역시 지수였을 것이다.


 부드러운 성격 위로 단단한 근육이 자리한 우리 중 최고 인싸 희윤은, 평소 너그러운 그의 모습처럼 우리의 바보짓에 열심히 호응해 주다 조용히 한 마디를 뱉었다. 경주전 말을 잘 봐야 돼. 가다가 똥을 싸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은 무조건이니까. 보나 마나 어디서 주워 들었을 말이 분명했지만, 결코 농담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한동안 우린 걷는 말의 엉덩이만 한참 쳐다보았더랬다. 말의 똥 외에 별다른 배팅 철학을 보여주지 못한 희윤은 결국, 초기 자본금의 절반을 겨우 지켜내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유행하는 핏의 넉넉한 바지와 품절대란의 신발, 빨간색 틴티드 선글라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한층 힙해진 기종은 여유로운 힙스터의 모습으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연거푸 어이없는 예측으로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급격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조급한 마음을 따라 배팅법도 널을 뛰었는데, 집단지성법, 말의 걸음걸이 분석법, 유튜브 맹신법 등을 오가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했던 마지막 예측마저 승리가 요원해지자, 결국 따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경마 이까짓게 무슨 재미냐며 손에 단돈 육천 원을 쥔 채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아기 아빠가 된 후 더욱 조심스러워진 나는 우승 예상마에 안정적인 배팅을 하며 차근차근 돈을 잃어갔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날의 주인공은 나였다. 얼마 전 꿈에 신세계 정용진 회장이 나타나 내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배당률 41.9프로의 대박 승부를 성공적으로 예측해 내며 단돈 삼만 원으로 최종 육만이천 원을 만드는 기염을 토해냈다. 하지만 나는 이날의 승리를 꿈이 아닌 내 아들 재이에게 돌리고 싶다. 내게 승리를 안겨준 2번 말의 기수 이름 역시 재이였기 때문이다. 예리한 눈썰미를 지닌 승준을 통해 이 멋진 우연을 알게 되자마자 나는 이번 승부에서 무언가 이루어질 거란 사실을 본능으로 알았다. 2번 말과 재이가 뛰자 내 심장도 덩달아 뛰었다. 나는 한껏 소리를 지르며 2번 말과 재이를 목청껏 응원했다. 결승선을 제일 먼저 통과한 2번 말의 이름은 투혼의 반석이었다. 나는 그것 참 좋은 이름이라 생각했다.


 경마장에서 실컷 웃었다. 시간이 20년쯤 흐르면, 바뀌는 것보다 바뀌지 않는 것들이 더 소중해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치 않는 바보스러움, 유치함, 건전함 같은 것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번 간만의 모임에서도 나는 우리의 변한 모습 보다, 그때 그 시절 변치 않은 모습이 반가웠다. 누가 컨설턴트가 되었건, 이름만 대면 대충은 아는 회사에 다니건 그런 것들은 상관 없다. 이 변치 않는 것들이 오래도록 한 자리에 지키고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언제고 돌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게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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