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얼마 전에 책 읽는 취미가 생겼다. 요새 유행하는 '텍스트 힙'보다는 이전에 독서라는 취미가 생겼지만, 신기하게도 내 마음속에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아 유명한 한강의 책이 들어올 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난해하다든지, 표현이 적나라하다는 누군가가 쓴 감상문을 봐서 마음속에 들이기가 어쩐지 무서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드디어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한강 작가의 책을 손에 잡았다. 책을 다 읽은 지금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내 인생은 달라졌다. 이 책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평가를 받는 책을 보면 높은 확률로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남았다. 예를 들면 성적인 장면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나 같은 의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으로 사랑받는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었을 때도,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는 장면을 읽고 그의 마음을 퍼뜩 이해하지 못했다. 문학 작품 속 성적인 장면은 단순한 쾌락이 아닌 작가가 의도한 주제를 드러내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위로와 소속감, 그러나 동시에 느끼는 고독감을 자아내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에서 표현된 막장으로 치닫는 장면들(성적인 장면으로는 특히 '몽고반점' 챕터)은 과연 무엇을 보여주는 걸까?
<채식주의자>는 인간에게 가해질 수 있는 온갖 폭력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영혜는 이러한 폭력에서 벗어나려다 자신조차 정신을 놓게 되어 버리는 인물이다. 언뜻 보면 영혜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어딘가 이상한 여자다. 서서히 바뀐 게 아닌 어느 날 돌변해서 채식을 선언하더니 냉장고 안의 고기를 갖다 버리고, 꿈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상의를 탈의하고, 나무가 되려고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이상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결과가 아닌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녀를 미치게 만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폭력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처형이 장인을 잡은 팔힘보다 처남이 아내를 잡은 팔힘이 셌으므로, 장인은 처형을 뿌리치고 탕수육을 아내의 입에 갖다 댔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내는 신음소리를 냈다.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리면 그것이 들어올까 봐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처남은 소리쳐 만류했으나, 얼결에 아내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으음...... 음!"
#어릴 적 개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 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중략)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예술이라는 가면을 쓴 몰락한 사람
이 이미지는 절정도 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반복되어야 했다. 침묵 속에서, 그 열락 속에서, 영원히. 그러니까 촬영은 여기에서 마쳐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그녀를 눕혔다.... 그녀의 거칠고 새된 비명을 지르게 했고, "그만......"이라는 헐떡임을 뱉게 했으며, 다시 눈물을 흘리게 했다.
#어릴 적 언니와 길을 잃었을 때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영혜의 이상 행동에서 시작되어 영혜의 언니이자 영혜의 예전 모습을 아는 인혜를 주인공으로 한 '나무 불꽃' 챕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먹는 고기까지 공격하지 않으려던 영혜를 배우자임에도 병원에 가보려는 노력조차 없이 떠난 남편, 사람들의 이해해 주지 않는 모습,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으로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던 아버지, 영혜를 향한 비이상적인 성적 집착을 보여준 인혜 남편 등을 통해 한 인간에게 얼마만큼의 폭력이 가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추악한 폭력의 얼굴을 여러 사건을 통해 담담하고 고급스럽게 표현했다.
그러나 폭력을 경험한 영혜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언니 인혜가 죄책감으로 정신 병동에 있는 자신을 평생 책임지게 만들었다. 인혜의 말마따나 남편이 '정신도 성치 않은 애'인 영혜를 성적 도구로 사용했으나, 결국 인혜를 포함해 인혜의 자식까지 사람들이 인혜 남편과의 일로 막장 스토리라며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들로 만들어버렸다. 영혜만 감싸기에는 죽고 싶어서 이 순간을 그저 꿈이라고 여기려고 하는 인혜도 가엾다. 누구도 상처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영혜 또한 상처를 줘버렸다.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인간은 완전히 고결하게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순 없다.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상처를 주는 게 인간이라니,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남는다. 한강 작가의 말대로 "여전히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라는 표현이 이제는 너무나 와닿는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을 억누르며 결국 미쳐서 폭주하는 영혜가 되기 전에, 우리가 정신을 잃기 전에 최대한 자신을 표현하고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채식주의자>는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했다. 영혜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나도 온순하게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던 적이 있기에...
마지막으로 책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의 내용을 말하고 싶다.
무엇을 하든 마음속에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1. 이 사람을 사랑한다.
2. 이 사람은 나를 화나게 한다.
이 두 가지 다른 생각에 중요도를 똑같이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의 그 사람 역시 그렇게 하길 희망한다.
이 책에서는 위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면, 사랑하지만 나를 화나게 하는 가까운 대상이 아무리 불합리한 말을 해도 극단적인 방식이 아닌 설득하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조금이라도 말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위의 1, 2번을 마음에 새긴다. 영혜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은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영혜는 어릴 적부터 저 사람들에게 적의보다는 호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서 결국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너무 극단적으로 치닫기 전에 자신의 표현하고 주장해야 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다시 생각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소설 속 영혜를 생각하면 참 가엾고 눈물이 난다.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에게 아버지가 억지로 탕수육을 짓이겨 넣는 장면을 보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있는 순간에 영혜는 자신의 의지로 채식주의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저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