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 (Gummo, 1997)
0.
<구모>(1997)를 보면서 영화의 성질을 직감했던 순간들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역겹고 불쾌한’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거리가 먼 조각들에 있다.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들 덕분에 <구모>를 두고 이른바 ‘퍽큐 시네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나에게는 영화에서 잉여의 상태로 존재하는 요소들이 더 흥미롭다. 이는 흡사 불쾌하고 역겨운 기름을 빨아들이는 흡착포 같다. <구모>의 이미지와 내러티브는 하모니 코린의 위악적 수사일 뿐이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기 위한 극단적인 비명에 가깝다.
1.
스킨헤드 두 명이 신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장난을 빙자하여 서로 주먹질을 주고받는다. 장난처럼 시작된 둘의 주먹질은 진짜 싸움으로 번진다. 둘은 연기를 하고 있지만, 씬 후반부에는 싸우는 와중에 한 배우가 당황한 듯 자기도 모르게 슬쩍슬쩍 카메라를 쳐다본다. NG 컷에 가까운 컷을 그대로 쓰는 이유는 단순히 다큐멘터리적 느낌을 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구모>는 확실히 통제되지 않는 무질서에 관심을 가지긴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폭력의 극단성에 대한 탐구가 더 커 보인다. 신발을 둘러싼 ‘대화’는 저녁 식사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때까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화제를 돌리는 이는 카메라를 쳐다보는 배우다.) 이렇듯 코린의 세계에서 폭력 혹은 쾌락은 좋든 싫든 끝까지 가야만 한다. 극단의 상황에 놓여야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상태들, 코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고 실험이다.
2.
솔로몬(제이콥 레이놀즈)의 집에 가득 찬, 너저분한 쓰레기들은 이 세계가 ‘비상식과 무질서가 놓여있음’을 상징한다. 이곳의 무생물들은 제 목적을 알 수 없거나 기능하지 못한다. 총을 쏘지만 대상에는 어떤 물리적 피해가 가지 않고, 욕조는 몸을 씻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영화에서 가장 불결한 공간이 되는 것처럼. 생물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정체성도 여기서는 누군가를 규정하지 못한다. 인간이 아닌 고양이마저도. 이들은 곧바로 흙탕물 속으로 놓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조점을 어디로 두냐는 거다. 나는 ‘비상식과 무질서’보다 ‘놓여있다’에 방점을 두고 싶다. <구모>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그야말로 ‘놓여있다.’ ‘놓여있음’을 감각시키기 위해 그들은 동일한 숫자인 상태에서 변용된다. 앞서의 스킨헤드는 금발 소녀로, 카우보이 소년들로, 비만 여성으로, 게이로, 흑인 소년들로 변용하는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영화에 등장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들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들 중에 진짜 쌍둥이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이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정면이자,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이데올로기의 이면이다. 어떤 의도나 의미도 없이 스크린 안에 놓여있는 존재들. 그러니 등장하는 순서대로 배역이 나오는 엔딩 크레딧은 당연하다. (지나친 겸양 같지만 하모니 코린 역시 감독으로 크레딧에 등장하지 않고 배역으로 나온다.) <구모>에서 주인공은 없어야 한다. 그들은 그저 이 세계에서 살아나갈 뿐이다. 토끼 소년(제이콥 스웰)이 보란 듯이 보여주는 고양이 사체는 이 위선적 세상에 대한 하모니 코린의 일갈이다.
3.
<구모>는 말의 언어가 빚어낼 수 있는 온갖 오해들을 한데 욱여넣은 다음,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아니, 오히려 즐긴다. 몸짓의 영화라는 사실을 알리면서도 또 쉽게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말하지 못하는 고양이는 계속해서 죽이고, 말로 정체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거나 극단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불쾌하게 만든다. 하모니 코린은 자신이 맘껏 오해 받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말의 언어가 벗겨진다고 믿는 것 같다. 말의 언어가 벗겨진 세계는 몸짓의 언어만 남는다.
그렇기에 <구모>는 몸짓의 언어로 대화하는 영화다. 말의 언어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시종일관 대화가 영화를 진행하게 만들지 않는다. 한 시퀀스에 나왔던 대화는 다른 시퀀스와 무관한 것이다. 딱 한 번 연결되는 순간이 있다. 솔로몬과 텀러(닉 서튼)가 제로드 위글리(다니엘 마틴)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할머니를 죽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제로드의 할머니를 죽이는 일은 살인이 아니다. 텀러의 말처럼, 몸짓을 잃어버린 인간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진흙탕의 세상에서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구모>에서 말이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몸짓이 부재한 공간으로 나아갈 때 쓰는 연결 통로일 뿐이다. 그렇다면 몸짓의 언어는 무엇을 남기는가. 남녀가 어울려 노는 그룹에서 한 남성이 ‘의자’를 부수는 장면은 그것에 대한 노골적인 답이다. ‘의자’가 그 공간에서 무엇으로 규정이 되었든, ‘어떤 남자가 무엇을 부수었다’라는 행위로 남게 한다. 적어도 <구모>에서만큼은,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4.
모든 것을 걷어내고 몸짓만 남게 된 영화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감독은 이 위선적이고 불결한 세상을 단순히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외려 그곳에서 맘껏 뒹군다. 그것은 존재의 진실한 양태를 찾아 나가는데 필수적인 여정 같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구모>는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오직 자신만 알면 되는, 자유로운 몸짓을 시작한다. 그 몸짓을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누구보다 따뜻하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아름다워지고, 인간 역시 아름다워진다. 역겹고 아름다운 인간들. 그야말로 역설적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