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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Apr 06. 2021

기록과 기억 사이

당신의 사월 (당신의 사월, 2019)


0.

영화감독 테시가하라 히로시는 아무리 의도되고 통제된다 하더라도 자연물의 움직임까지는 통제할 수 없는 영화의 속성을 은유하면서 자신의 영화 <모래의 여자>를 ‘다큐멘터리 판타지’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 말이 시사하는 건 어떤 실사 영화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지금 이 순간을 카메라로 찍는다’는데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기록’하는 행위다. 영화는 이렇게 기록된 순간들을 기반으로 편집을 하여 재구성한다. 견고하게 짜여있는 편집 시트이든, 변덕스러운 감정을 지닌 감독이든 편집의 과정에서 우리는 기록들을 참조한다. 그런데 이는 인간이 무언가를 기억하는 행위와 똑같은 방식이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기억은 같은 듯 다른 틀린 그림 찾기의 판본처럼 화면이 바뀌는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1.

보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모두 일정 부분 (포괄적인 재현의 개념이 아닌) 기록의 측면을 전제하고 있음을 비추어볼 때 특히 다큐멘터리 장르에서의 기록 행위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딱히 문제적인 것도 아니다. 현장의 카메라는 창작자의 의도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종종 촬영자가 의도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거나 창작자가 재발견하여 서사화나 의미화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설령 당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촬영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찍은 촬영자나 감독, 혹은 편집자에게만큼은 기억되거나 보존되어 그 영화의 역사에 기입이 되고, 언젠가는 다른 장소에 소환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마치 유령처럼, 피사체의 존재감이 강력하면 피사체와 일체화하여 자신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반대로 피사체의 존재감이 약하면 카메라 뒤의 존재, 혹은 스스로를 드러내어 자신을 중요하게 만든다. 특히 모두가 자신만의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현대에서 영상 기록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2.

그러니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기록의 방식을 두고 언제나 고민을 해왔다. 어떤 감독들은 도리어 현장 속 카메라의 힘을 더욱 강조하기도 하고(수많은 미디어 액티비즘 영화들), 카메라를 다양한 사람이나 피사체였던 사람에게 넘겨 시점을 다양화함으로써 분산시키기도 한다.(<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2014)) 아니면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어 카메라를 자신과 일치시켜 일시적으로 잊게 만들거나, 들리는 소리나 증언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기록을 다른 방향으로 재현했다(<쇼아>(1985)). 그런데 이를 두고 ‘기록’과 ‘기억’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물론 이는 일견 이상한 말일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자신이 직접 혹은 발굴한 기록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거나 어떻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면 기록과 기억은 상호보완적인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집의 과정을 거친 이상, 하나의 영상에서 취사선택된 기록들은 모두 창작자의 의도에 수렴된 결과물로써 상호보완적인 존재인 것이지 그 외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기록들은 분명하게 관계를 알 수 없다. 사실상 (의도치 않았겠지만) 기록자의 의도에 저항하다 배제된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처음에 의도된 촬영물들이 영화가 다르게 전개되어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나 당시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쓰이게 된 파운드 푸티지의 다른 부분들에게도 적용된다. 특히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에서 의도보다는 기록이 우선되는 순간, 즉 촬영자 그 자신도 지금 촬영하는 이미지가 어떤 의미로 기억될지 모른 채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인간에 의해 채집된 기록물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기억과 필연적으로 싸움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우리가 보는 기록물은 언제나 존재해왔거나 혹은 생성된 세계의 일부가 인간에 의해 소환된 것이고 인간은 거기에 사후적 의미를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 일부는 너무 강력해서 거부당하기도 한다. 그 적나라한 의미나 고통,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버거운 감정들을 차마 담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망각‘되는’ 기록들은 각자의 크기에 비례하여 서서히 형해화되어 점차 무미건조해진다.

 

3.

주현숙의 <당신의 사월>은 바로 그 지점에서 얘기해볼 수 있는 영화다. 물론 <당신의 사월> 역시 앞서 쓴 개념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결국 편집의 결과물이고 감독의 취사선택을 받은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한계조차 품은 채 기록과 기억 사이의 투쟁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려 한다. <당신의 사월>은 이미 수없이 많이 기록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기억된, 침몰 당시 세월호의 이미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각자의 증언을 모은다. 인물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증언하는데, 영화는 세월호로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에서부터 사건과는 전혀 상관 ‘없었던’ 사람들의 말까지 모두 기록한다. 이는 세월호 유족들을 부정하는 세력에게까지 확장하여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유족들 앞의 폭식 시위로 자신의 ‘배부름’을 전시하고, 세월호 유족들이 지겹다며 반대 시위하는 사람들 역시 기록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기록은 독립적이지만, 기억은 사회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 당연한 명제를 <당신의 사월>은 스스로 우익 세력을 보여줌으로써, 또 자신이 그들에게 취하는 태도를 통해 그것을 이중으로 증명해낸다. 그러니까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하는 것이다. 작용이든, 반작용이든 그들 역시 세월호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 다시 중요해지는 건 인물들이 기록하는 방식이다. <당신의 사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다르게 세월호를 기록한다. 카메라를 들고 세월호를 기록하려는 유족(문종택)부터 세월호 당시의 현장을 기억하는 증언으로(이옥영), 말 그대로의 ‘기록관리학’을 공부하면서(이유경), 광화문의 옆에서(김철우), 유족의 옆에서(정주연), 교실에서(조수진), 심지어 들어 올린 세월호의 모습마저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세월호의 이미지를 갱신하며 기록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영화 안에서 종종 잊혀졌던 당연한 사실, 즉 ‘기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카메라는 특권적이었던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는다. 설령 더 이상 이들을 촬영하지 않거나 혹은 이미 감독에 의해 배제된 인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무수한 방식으로 기록되고 있는 세월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써 기록과 기억의 투쟁은 영화라는 매체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4.

영화가 주목하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당신의 사월>은 세월호라는 거대한 트라우마를 ‘올바르게’ 기억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영화다.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기억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끊임없는 기록 행위를 통해 기억과의 치열한 투쟁을 해나가는 것.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계속해서 덧발라 그때의 기록이 빛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이는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한 기억의 객관적 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성찰, 시시각각 바뀌는 자신의 기억에 대항하여 당시의 기록이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기록과 기억은 누군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님을, 지금 당장 우리들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뜨겁게 외친다.

 

누군가는 당연한 말을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연한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당신의 사월>은 감각하게 만든다. ‘24시간 세월호만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라는 말에 우리는 섬짓함을 느끼면서도, 인간의 당연한 속성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려는 순간, 기록과 기억 사이의 투쟁은 빛을 발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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