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샌들러 연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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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우들은 배역에 맞추어 자신을 지우고자 할 때, 어떤 배우들은 도리어 배역보다 자신을 더욱 부각시켜 배역을 자신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기도 한다. 잠깐 논의를 돌려 하나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던킨도너츠 광고에 알 파치노를 섭외하기 위해 농구 코트를 찾는 광고기획자 잭. 그에게 농구 경기는 안중에 없고 오로지 알 파치노를 만나는 게 급선무다. (<잭 앤 질>(2011)) 일생일대의 기로에 선 하워드는 자신에게 오팔을 산 케빈 가넷에게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한다. 하워드에게 경기의 결과는 인생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순간이지만, 농구 그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에겐 농구는 오로지 지금의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언컷 젬스>(2020))
물론 이 예시는 상당히 거칠게 두 개의 작품을 연결시킨 것이지만, 적어도 하나의 성질은 공유한다. 선수들이 룰을 지키며 코트를 누빌 동안 코트 밖에서 게임의 결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게 협잡이든, 사업이든) 자신만의 일을 해내려고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존재 말이다. 마치 세계와 무관한 인물이라는 듯 외부인처럼 행동하는 이들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 안에서는 이와 같은 ‘외부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감독이라는, 환영의 세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창작자와 그에 못지않게 안팎에서 자신의 자장에 포섭하려는 자본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매체인 영화의 특성을 감안하면 영화 안의 어떤 존재가 홀로 기능하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 각본과 연출에 의해 자신을 어느 정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배우에게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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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아담 샌들러는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한다. 다른 배우들이 인물과의 혼연일체를 통해 배역 그 자체를 관객에 가닿게 하거나 일치시키려 할 때, 아담 샌들러는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채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려고 한다. 특유의 무표정이나 헤어스타일, 껌뻑이는 눈, 예측 불가능한 연기와 영화 밖 자기 반영적 요소로 끊임없이 영화 안의 ‘아담 샌들러’를 구축한다. 물론 이런 배우가 아담 샌들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타 하겐의 주장처럼 배역을 해석한 다음 새롭게 창조하여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는 내면적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나, (우타 하겐의 논의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하나의 이미지로 끊임없이 소비되었던 배우들은 고전 코미디에서부터도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아담 샌들러는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고정시키지 않음으로써 양가적 속성을 만들어낸다. 분명 영화에 놓여있는 존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 샌들러이고 그는 변하지 않았지만, 어떤 감독들은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를 완전히 비틀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화 안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얼굴이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런 그의 얼굴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담 샌들러는 자신이 제작하거나 각본을 쓰는 영화에 스스로 출연까지 하면서 영화 속 ‘아담 샌들러’를 정교하게 조각해낸다. 그가 각본을 쓰거나 제작했던 영화들은 미국식 B급 코미디, 이른바 화장실 유머로 점철되어 사람들의 야유나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아담 샌들러’라는 특징을 만드는 데 역할을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그는 여전히 이런 영화에 출연을 한다) 그야말로 자신을 어떻게든 영화에 쑤셔넣음으로써, (그라면 아마도 이렇게 표현했을 것 같다) 영화 안에서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그의 필모그래피 곳곳에는 유대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을 풀어내거나 자신과 유사한 성격의 캐릭터가 새겨져 있다. 그 결과 대중들에게는 ‘아담 샌들러’라는 배우가 각인되고 서로 다른 작품 속 배역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부성에 대한 갈구, 혹은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찬미 같은 정서적 맥락도 그렇지만, 단순한 개그 요소들, 이를테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만의 언어를 말한다거나(<백만장자 빌리>(1995), <잭 앤 질>), 아일랜드계 미국인에 대한 괴악한 농담을 던지거나(<백만장자 빌리>, <클릭>(2007)), 심지어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을 카메오로 출연시키기도 한다. 그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사후적 편집으로 자연스럽게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커리어 최악의 작품과(<잭 앤 질>) 최고의 작품(<언컷 젬스>)을 연관 지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담 샌들러가 아니라면 흔히 시도될 수 없다. 재밌는 것은 이런 속성이 거창한 예술적 야심이라기보다, 아담 샌들러 자신을 ‘브랜드화’ 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브랜드화된 ‘아담 샌들러’는 할리우드에서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다시 말해 통제받지 않으려는) 할리우드식 저항 법이다.
<샌디 웩슬러>(2017)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샌디는 그동안 아담 샌들러가 연기해왔던, 순진하지만 어떨 때는 역겹기도 한 멍청하고 능청스러운 캐릭터의 총체와 같은 인물인데, 〈샌디 웩슬러〉의 실제 모델이 매니저이자 샌들러의 초기 출연작 기획을 맡기도 했던 샌디 워닉이라는 사실을 비추어 본다면 아담 샌들러의 초기를 시사하고 있는 것만 같아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미국 연예계의 셀럽들이 등장하여 샌디에 대한 증언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샌디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시퀀스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샌디의 목적처럼 보이는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을 이미 했다 역설적 방증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언급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샌디는 할리우드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떨치고 있음을 예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괴짜, 아니 루저에 가까운 샌디의 성공담이 아니다. 성공은 이미 밝혀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일 뿐이다. 그 대신 영화는 그의 관계 맺는 방식에 주목한다. 듣기 싫은 하이톤 목소리에 괴상한 생활 습관, 트렌드와 동떨어진 감각으로도 모자라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샌디 웩슬러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호감을 선뜻 표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샌디는 '실패한 사람들' 곁에 서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거짓말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을 허황된 이미지로 통제하려 들지는 않는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할리우드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이미지로 대체한다. 성공한 코트니(제니퍼 허드슨)에게 가해지는 무수한 통제를 보라. 그런 측면에서 샌디 웩슬러의 행보는 할리우드를 향한 일종의 저항이다. 거짓과 기만의 세계에, 샌디 웩슬러와 아담 샌들러는 자신의 '통제 불가능함'으로 대응한다. 재밌는 것은 거짓과 기만의 세계에 대응하기 위해 거짓말이 동원된다는 사실이다. 샌디는 자기기만의 형태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댄다. 그의 거짓말은 타인의 이해를 두려워하며 불허하는, 방어의 몸짓에 가깝다. 샌디는 거짓말로써 통제를 벗어나는 동시에 자신이 싸우려는 세계에서 얼마간 자유를 박탈당한다. 세상은 그의 거짓말을 '괴짜 매니저의 전설'로 소비하며 이용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할리 우드답게 샌디의 저항마저 캐릭터화 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브랜드화하는 아담 샌들러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속성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샌디 웩슬러〉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크린 안팎을 시사한다. 이는 영화 밖의 아담 샌들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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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샌들러의 자기 반영성이 영화 밖의 요소에 기대어 기능하는 것이라면 그의 무표정은 영화 안에서 기능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무표정의 이미지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지가 핵심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는 꽤나 풍부한 표정을 지니고 있고 영화에서도 곧잘 나오지만 왜 특유의 무표정으로 기억되는 것일까. 물론 코미디 장르의 컨벤션에서 무표정은 중요하게 기능(<펀치 드렁크 러브>(2002)가 이를 잘 이용하고 있다)하긴 하지만, <첫 키스만 50번째>(2004) 같은 로맨스 장르에서도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장르의 문제는 아니다. 아담 샌들러의 무표정이 무엇보다 혼란을 주는 건, 그가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판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영화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감정의 경로를 거부하겠다는 듯이 어떤 감정이 들어가야만 하는 순간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이는 초기 출연작에서부터 잘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빅 대디>(1999)의 마지막 시퀀스가 그렇다. 영화 자체는 장르의 질서에 잘 순응하는 맥 빠지는 코미디 영화지만, 아담 샌들러의 무표정이 만들어내는 (의도와 무관하게) 저항이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친구의 아이를 기르기 위해 자신이 아버지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사이가 틀어진 아버지를 상대로 펼치는 변론이 그것이다. 분명 감정적으로 응축되고 감동으로 전환되어야 할 순간에 그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무표정으로 읊조림으로써 장면은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뒤이어 나오는 다른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은 오히려 그 장면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영화가 의도한 감정에 따라 표정을 지었던 <클릭>이 얼마나 평범한 영화였는지 상기해본다면, 아담 샌들러의 무표정은 그가 가진 예측 불가능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잔상을 남긴다.
3.
이렇듯 아담 샌들러는 어떤 영화에서든 ‘아담 샌들러’를 위치하게 함으로써 감독들에게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감독들이 자신을 이용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볼 수 있는 일종의 시험대와 같은 존재다. 공교롭게도 아담 샌들러가 각본이나 제작을 맡았던 작품과 연기만 했던 작품의 괴리는 그런 심증을 강하게 해준다. 그러니 아담 샌들러의 ‘통제 불가능한 얼굴’을 쓰고 싶은 감독들은 좋든 싫든 그와 게임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감독들은 그와 똑같은 패인 ‘통제 불가능’을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 <언컷젬스>가 그런 작품들인데, 두 작품 모두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 놓인 인물을 내세우면서 외부인으로 기능하려는 아담 샌들러를 세계에 편입시켜버린다.(특히 <펀치 드렁크 러브>는 애초부터 아담 샌들러를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이기에 그를 세계화한 것에 가깝다) 아담 샌들러의 특징을 역이용하는 감독도 있다. <레인 오버 미>(2007),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 제대로 고른 신작>(2017, 이하 <마이어>)가 그렇다. <레인 오버 미>는 거대한 비극으로부터 자신조차 어떤 감정인지 깨닫지 못하는 인물의 무표정을 구현하고, 어긋나 버린 사랑의 방향이 백미인 <마이어>에서는 매튜(벤 스틸러)의 울고 있는 표정과 대비되는 대니(아담 샌들러)의 무표정은 그 자체로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작품 모두 아담 샌들러의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다른 인물을 경유하여 다시 그의 얼굴에 감정을 부여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게임의 승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담 샌들러를 답습하는 세계든, 아담 샌들러를 새롭게 창조하는 세계든, 모두 ‘아담 샌들러’라는 인물 자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는 영화에서 언제나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외부자의 속성을 지니지만, 자신의 영역 자체가 영화에서 역할을 하게끔 만듦으로써 내부자의 속성 또한 지닌다. 이 양면적 속성을 가졌기에 아담 샌들러는 언제나 ‘아담 샌들러’로 남을 수 있게 된다. 그 어떤 세계가 와도 ‘아담 샌들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대담한 믿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