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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Sep 24. 2020

참다 폭발해서 인연 끊느니

뒤끝 없는 그날까지 나는 꼭 달라지고 말 거야

가기 싫었다. 가지 않아도 될 명분이 있었다. 코로나 정국이니까. 지금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라면 고민하고 고 할 일도 아니었겠지만 그땐 애매한 시기이긴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마스크를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때. 끝내 내가 미적거리고 안 가면 상대가 저으기 서운할 수도 있는 상태. 저렇게나 굳이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데도 나중으로 미루면 왠지 사람 도리를 안 한 것 같아 찜찜한, 2월 말이었나 3월 초였나.


올 1월 말 지방에서 경기도로 이사 한 Y가 집 구경을 오라고 전화를 했다. 헐벗은 나무에 연초록 새순이 빠꼼히 돋을 무렵이었다. 이사 온 지 한 달쯤 된 즈음에 사람을 불러 본 적이 없는 나로선 퍽 의아한 제안이었다. 포장이사를 했다 해도 아직 집 정리가 끝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런 상황일 경우, 나는 상대방이 먼저 놀러 오겠다는 제안을 하기 전에 내가 오라 가라 하 요구하는 성격이 못 되기 때문. 관계를 주도하는 입장이기보다 늘 '처분만 바랍니다' 쪽인 탓이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큰애 학부형 모임에서 알게 된 Y와는 동갑인 데다 세 살 터울의 남매를 둔 공통점 때문에 가까워졌다. 나야 그 지방에 연고가 없는 뜨내기였지만 그 도시에서 태어나 그 도시에서 대학까지 나온 Y는 친구가 많았다. 투가 거칠고 무례한 것 같은데도 은근 사람 부자였다. 무장해제 해도 될 만큼 내 편이란 확신이 들 때라야 곁을 주는 나와 달리 그녀는 아무에게나, 언제 밥 한 번 묵읍시더, 라고 말을 건네곤 했다. 그런 말은 뱉자마자 곧 약속이 성립된다고 믿는 나에게 그녀가 때로 실없는 사람으로 비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라고 한때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주고 싶었던 친구가 없었을까. 까칠하고 냉랭해 보여도 팔도강산에 친구를 심어놨다는 말도 숱해 들었으니. 일반화의 오류라는 비난을 각오하고 말하자면 사람은 상대가 자기보다 잘 못 돼 있을 때까지만 관대하다고 언제부턴가 믿기 시작했다. 자식이 어떤 대학 진학했는지, 직장은 전문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또는 남편의 진급 같은 것에 영향받는 우정. 뼛속 깊이 그걸 깨달은 후부터 나는 관계에 미련두지 않았다.


그 점에서 나는 면죄부라도 받았기에 이따위 소릴 지껄이냐고? 그럴 리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사람에 치여 가슴 한 귀퉁이에서 반대쪽으로 찬바람이 슝, 지나가는 날이면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애와의 관계를 기준 삼아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 하고도 이렇게 소통이 힘든데 하물며 …. 그러고 나면 희한하게도 숨통이 트였다. 아무에게도 서운할 일이 없었다. 내가 품이 넓고 속이 깊어서는 결코 아니고 나 자신이 상처 받지 않으려는 고육책일 뿐이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끄응, 한숨이 나왔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가겠다고 한 번쯤 얘기했어도 좋았을 법했는데, (지금이야 코로나 초기에 사람 노릇하고 오기 참 잘했다 싶지만) 그러면 관계에서 늘 손해 보고 치이는 기분은 없을 텐데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쯤 왔어? 우리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 성질 급한 Y의 카톡이 울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오지 말았음 하는 쪽보다는 와 줬음 하는 사람 군에 속하는 게 백 번 낫지. 그러자 사람  좋아하는 Y가 아직 정을 못 붙인 아파트 단지 류소를 베란다에 서서 눈 빠지게 내려다 보는 듯 맘이 바빠졌다.


나름 20년지기와 만나는 일이니 흥분이 된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올라탄 순간 땀이 진득하니 배어 나왔다.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을 때 Y는 왼쪽 귀와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낀 채 나를 맞았다. 한 손으로 소파를 가리킬 뿐 계속 통화를 해대는 품이 나는 거기에 ‘없는 사람’ 일 듯한 예감이 들었다. 지방 소도시에 같이 살던 동안 그녀 집엘 방문했을 때도 종종 봤던 풍경. 김이 샌다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다음 주 화요일, 도착하면 꼭 진해 식당으로 가래이. 내가 주인한테 미리 전화해 놀 껀께. 시간 알려 주면 주인이 알아서 딱 먹기 좋게 도다리 회 떠서 준비해 놓고, 도다리 쑥국도 준비해 놓으라고 내가 다 말해놨다. 키위도 사온나. 거기 바닷가라 키위 농사가 좋다. 알겠나.”


별 얘기도 아니구먼. 심드렁해지는 내 마음과 달리 Y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대며 통화를 이어갔다. 꽁해지려는 소갈머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주방 쪽으로 갔다.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받아 마시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럴 때 스마트폰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소파에 앉아 그녀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주식 MTS를 보다 뉴스를 검색했다. 코로나 시작 단계라 그런지 기사 사이사이 여행사 광고가 틈입했다. 지난여름 오사카 자유여행 갔다가 거의 굶고 돌아온 딸의 지친 표정이 불쑥 끼어든 건 예정된 수순이었.


반년도 더 지난 일인데, 여행 가서 자기 주장 못했던 바보 같은 딸애와 눈곱만큼의 연관성만 있으면 떠오르는 그 일. 그날의 저릿하고 묵지근한 통증이 떠오르자 가슴 한 켠이 또 싸하니 아파왔다. 속상했던 그 기억을 떨쳐버리는 방법은 Y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주고받는 것뿐인데…. 이런 내 맘을 알 리 없는 Y의 전화질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야속한 마음 어쩌지 못해 그녀에게 퍼부어주면 속이 후련할 문장을 대사 연습하듯 몰래 우물거렸다.

 

‘Y 씨 바쁜가 봐. 나 그냥 갈까?’

‘카페 가서 기다릴 테니까 통화 끝나면 연락할래?’

‘계속 이러면 Y 씨, 다신 안 보는 수가 있어!’


이불 속에서 활개 치기였다. 매사 이 모양이니 딸도 오사카까지 가서 좋아하는 일본 라면도 한 그릇 못 먹고 왔지. 또다시 딸애가 의식 속으로 파고들자 나도 모르게 비장해졌다.

 

“Y 씨, 이제 그만 끊지?”

눈 깜짝할 새였다. 급작스럽게 터져 나온 말에 내가 더 놀랄 지경이었다. 기름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Y가 나를 쳐다봤다.


“무슨 통화를 얼마나 오래 했다고 그래? 쫌만 기다려. 곧 끝나.”

수화기를 한 손으로 막더니 윙크를 하며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미안하다면서 서둘러 끊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뜻밖의 대꾸에 잠시 멍해진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지금 시점에 Y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참는다면 딸도 평생 나처럼 맹하게 살 것 같았다.


이직이 자유로운 회사에 다니는 딸이 지난여름 반년만 쉬겠다고 했다. 한 달가량 혼자 유럽을 다녀오더니 대학 친구랑 어찌어찌 시간이 맞았는지 내처 오사카로 자유 여행을 갔다. 밤 11시가 다 돼 일본서 돌아오던 날 그 시각에 밥을 달라는 것이었다. 세 끼 밥 외에 야식도 군것질도 싫어하던 애가 웬일인가 싶었다.


‘말해봤자 바뀔 게 없으면 입을 안 연다’를 지론持論으로 삼고 있는 무던한 딸애가 드물게 속을 털어놨다. 함께 간 친구가 밥을 몹시 싫어하고 주전부리만 하는 스타일이라 제대로 된 끼니를 한 번도 못 챙겨 먹었다는 것이었다. 늘 밥에 목숨 거는 내 입장에선 분기탱천할 수밖에 없는 뉴스였다.


‘입 놔뒀다 뭐하고! 이 바보 멍청이 같은 것아!’


짠한 마음과 비례해 맘 속 깊은 곳에서 천불이 올라왔지만 내 성질부터 부릴 때가 아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제 주장을 못해 허기져 다녔을 새끼 모습을 상상하니 소금 뿌린 듯 아렸다. 혼자 고상한 척하려고 내 자식보다 상대편 입장에 서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지껄였던 예전의 나를 벗어던진 지는 이미 오래. 그 순간 어떤 말이 딸에게 가장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될까 고심하던 나는 마침내 배에 힘을 주고 절규하듯 말했다.

 

“저런 나쁘으은 녀어언!”


웃고 털어버리자고 한 그 말은 그러나 딸을 웃게 하지도 힘나게 하지도 못했다.

“아냐 엄마, 걔도 내가 다 맘에 들기만 했겠어? 그니까 나도 참고 맞춰주는 게 맞지.”


아! ‘뿌린 대로 거둔다’ 더니! 욕을 들어 마땅할 사람은 딸 친구가 아니라 나였다. 딸애가 한 말은 갈등과 다툼이 싫어서 내가 자기 합리화를 할 때마다 써먹던 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 밤 가슴을 치며 살아온 날을 되짚어봤다. 공무원 살림 사느라 여유가 없던 나는 애들에게 ‘선택’의 카드를 여러 장 쥐어주며 키우지 못했다. 대충 적당한 선에서 이미 다 결정해놓고 아이들에게 따르라고만 요구했을 뿐.


주변에 피해는 안 주되 당당하게 할 말 다 하면서 살라는 가르침 대신 양보와 배려만 강조했다. 자식을 바르고 착하게 잘 키웠다는 말을 듣기 위한, 그건 결국 내 이기심이었다. 성질이 드센 아들놈은 제 목소리를 낼 때가 많았지만 맏이인 딸은 엄격한 엄마 앞에서 늘 입을 다물었을 터였다.


내 새끼를 봐서라도 나는 달라져야 했다. Y가 상처 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조곤조곤 입을 열 필요가 있었다. 딸애가 뒤에 서서 내가 하는 양을 죽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통화를 얼마 안 했다고? 삼십 분이나 했는데 몰랐어? 내 시간도 아깝다고, Y 씨! 서울서 여기까지 왕복 네 시간이 넘는 거리, 알아? 코로나 때문에 다들 몸 사릴 때 기어코 사람 오라가라 했으면서…,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


Y가 ‘어쭈, 이것 봐라’라는 듯이 씩 웃더니 전화를 끊었다. 예의 타령까지 해댈 건 뭐냐고 투덜거리는 척했지만 커피랑 빵을 내오는 표정이 밝았다. 평소 자기는 할 말 다하기 때문에 뒤끝 없다고 부르짖던 Y다왔다. 내친김에 나는 막판 굳히기로 들어갔다.


Y 씨 고향에 놀러가는 사람에게 정보를 주는 건 알겠어. 근데 다음 주 화요일 간다며? 닷새나 남은 일을 꼭 이렇게 오늘…, 나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만들어 가면서까지 해야겠어? Y 씨, 그동안도 이런 적 많았는데, 그거 알아?”


마지막 말은 참았어야 했을까. 아닌 게 아니라 Y가 입을 삐쭉거리며 뒤끝 없는 자기 좀 본받으라고 구시렁거렸다. 나도 더 이상 지고 싶지 않았다. 실실 웃으면서 할 말 다하는 Y 씨 같은 사람은 무슨 뒤끝이 남겠냐고. 제때 말 못 하고 참는, 겁 많고 착한 나 같은 사람에게나 뒤끝은 있는 법 아니겠냐고 쏘아붙였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 가슴이 뻐근했다.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라도 했더니 체증滯症이 내려간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하철 역 하나씩 통과할수록 가슴이 불편하고 답답해왔다. 딸아이를 봐서라도 버텨보려다 나는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Y에게 사과 조의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절반의 실패? 아니면 절반의 성공? 그래도 내심 기뻤다. 오늘 이만큼 바뀐 것만도 장한 거라고 위로하면서 나는 열심히 독수리 타법으로 톡을 썼다.

 

-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었던 거 알지? 참다 참다 폭발해서 인연 끊는 것보다 조금씩 화 잘 내는 게 필요하다고, Y  씨랑 나, 언젠가 말한 적 있잖아. 상대가 당신이니까 용기 있게 내지를 수 있었어. 오늘처럼 하다 보면 나도 곧  Y 씨처럼 뒤끝 없는 사람 되겠지? 내 딸을 위해서라도 나는 꼭 달라지고 말 거니까 두고 보셔~~곧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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