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입원에 달려간 건 ‘공부 잘해봤자 지 잘났다고 멀리 사는 자식 2’인 둘째 언니였다. 코로나로 새로운 세상을 맞은 우리에게 입원 생활도 새로웠다. 간병인은 무조건 1인, 간병인도 입실 전에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아야 하고, 입실 후에는 퇴원까지 들락날락할 수 없다. 다들 출근도 하고 애도 봐야 하는 다른 자식들보다 싱글에 노트북 하나로 일하는 프리랜서 둘째 언니는 이번에도 긴급할 때 쓰는 치트키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내가 최근에 차를 샀던 게 신의 한 수였어. 뭘 싸야 할지 몰라 싸다 보니 짐이 세 보따리나 나온 거 있지. 버스 타고 이고 지고 다녔다고 생각해봐라야.”
아버지의 입원이 결정되고 나서 오빠와 언니 사이 무슨 얘기가 오고 갈 시간이 있기나 했었나 싶은데 이미 둘째 언니는 움직이고 있었다. 병원으로 달려가는 초보운전자의 목소리에 언니는 쿨내를 잔뜩 묻혔다. 며칠 전 막냇동생의 오열을 생생하고 실감 나게 접한 언니는, 지금 또 자신을 치트키로 쓴다고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동생을 읽은 언니는 괜히 목소리에 명암을 한껏 높였다.
언니는 아주 똑똑하고 묘하게 순수한 면이 있다.
그 묘한 순수함은 집에만 있어 만들어진 건지 타고난 건지 모를 일이다. 당연히 알 것 같은 부분을 전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부분을 꼭 집어 물어본다. 대놓고 물어보기 힘든 부분일 때도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그 질문은 희한하게도 무례하지 않고 되려 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이 묻어있다. 마흔을 훌쩍 넘겨놓고도 그런 질문들을 하고는 눈을 반짝인다.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도 한참 자기 이름도 못썼다는 언니의 이야기는 엉덩이로 공부해 연세대까지 간 느린 아이 신화의 시작이다. 그런데 느리긴 했어도 번득이는 면이 없는 건 아니었다. 미술이라고는 학교에서만 배워놓고 전국 미술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아온다거나, 지방 비평준화 명문여고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거나. 그런데 가족들은 언니가 어찌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랬다는 것 밖에 모른다. 아버지는 바깥 일로, 엄마는 모든 일로 바빴고, 언니 동생들은 자기 일로 바빴다. 언니는 그림자처럼 집에 있다가 주말도 없이 늘 학교에만 가는 그런 학생이었고 그렇게 오며 가며 말도 없었다.
그런 언니가 목소리를 내는 날은 심각한 날이었다. 사달라고 한 참고서가 늦거나, 사두라고 한 준비물이나 물건이 제때 쥐어지지 않으면 악을 썼다. 네 살 터울의 남동생과 자기를 차별한다며 자기가 집안에서 제일 대접을 못 받는다며. 내가 목격한 차별은 없었다. 오빠도 엄마에게 등짝을 맞으며 욕을 먹는 건 매한가지였고 하루하루 생존이 벅찼던 그때 대접이랄 것도 없었다. 그나마 공부만 하는 언니에게 너그러웠던 게 엄마였다. 언니가 악을 써도 엄마는 늘 할 말이 있었다. 제 아무리 공부해봤자, 힘들어봤자, 집에서 제일 열심히 사는 사람은 엄마였으니까.
“가서 데모하지 마라”
평소 말수가 적으신 아버지와 더 적었던 둘째 언니의 대화는 포착하기도 기억해 내기도 쉽지 않은데, 하나 떠오르는 게 언니의 대학 상경 직전 아버지가 지령같이 내리신 말씀이다. 엄마는 등록금이 비싸네 어쩌네 진심으로 투덜거리셨지만 아버지는 늘 고요했다. 공무원연금공단에 등록금 대출 신청을 하려고 사무실에서 언니 고지서를 복사할 때나 돼서야 사무실 직원들은 언니의 합격 소식을 알아차렸고, 따님이 그 어려운 대학, 그 어려운 과를 들어갔냐며 부산스럽게 축하 인사를 전할 때 그나마 고요히 미소 지으셨다.
언니는 대학 가서 데모도 하지 않았고 딱히 사교성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시골 아이의 상경, 신촌의 화려함, 생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던 같은 과 친구들 집안의 재력, 비싼 등록금에 비싼 물가, 그 와중에 배울 게 없는 수업. 어떤 부분이 트리거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언니에게는 우울감이 왔고 한 번씩 부모님께 터트렸다. 그런 와중에 집 안에서만 일해도 억척같은 면은 엄마에게 물려받았는지 그렇게 일산에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마음도 돌아왔다.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리고 그 사이 부모님은 늙으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