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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Mar 10. 2024

[산티아고술례길] 오늘은 쏘주 까는 날

산티아고순례길 19일 차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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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9일 차
2018. 6. 1. 금요일
렐리고스(Relliegos) - 레온(Leon)



순례길에서 맞는 여름의 첫날

어젯밤에는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다리가 저려올 정도로 아파서 오늘 걷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어나니 멀쩡했다. 유난히 말짱한 정신으로 시작하는 아침이다. 운 좋게 브루스케타(bruschetta)를 파는 바를 만나 하몽과 토마토 맛이 가득한 신선한 아침을 먹었다. 하몽 위에 뿌려진 올리브유는 왜 이리 맛있고, 조각나 있는 토마토도 왜 이렇게 맛있는지. 한국에 들어갈 때 뭐든 사가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도 카페 콘 레체(카페라테)와 오렌지 착즙 주스는 빼먹지 않고 꼭꼭 마셨다.


오늘은 6월 1일. 여름의 첫날이다. 딱 하루 차이인데 어제와 오늘의 바람과 공기가 다르다. 여름답게 조금만 걸어도 벌써 후덥지근해지는 것 같다. 순례자들이 다들 허리에 얇은 재킷을 동여매고 있다. 5월의 하늘색이 깊은 파란색이었다면 오늘의 하늘은 크레파스에 있는 하늘색 같다. 녹음이 번창하던 풀과 나무도 이제는 노란 여름 햇볕을 머금었다. 니꼴라를 오늘 아침 다시 만난 건 또 하나의 행운. 우리는 서로 꼭 끌어안고 안녕을 빌며 인사했다.


어제 만나 인사를 나눴던 '빨간 반바지' 아저씨랑도 만났다. 빨간 반바지 아저씨가 놀라웠던 건 우리가 더 일찍 출발했는데도 우리보다 앞에서 걷고 있었다는 거다. 우리가 바를 들르며 뉘엿뉘엿 걸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저씨의 걸음이 빠른 걸까? 아저씨는 오늘이 까미노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특히 유럽권 사람들은 이렇게 짧은 구간씩 까미노를 걷는 사람이 참 많다. 언제나 지리적 접근성과 저렴한 항공권, 그리고 긴 휴가가 부럽다.


오늘도 열심히 먹는 우리



순례길에서 가던 길을 되돌아간 이유

날씨가 덥긴 더웠다. 레몬 맥주가 아니면 해갈할 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해 열심히 레몬 맥주를 파는 곳을 ㅍ찾았다. 드디어 바에 들어가 레몬 맥주를 한 잔 시켰는데, 쇼케이스에 보이는 몽실몽실한 또르띠야가 눈길을 끌었다. 또르띠야는 스페인식 오믈렛인데 시금치나, 감자 등을 넣어서 든든하게 만드는 오믈렛이다. 내가 지금까지 먹어봤던 또르띠야는 반찬으로 나오는 계란말이처럼 수분감이 없는 퍽퍽한 식감의 오믈렛이었지만 눈앞에 놓인 건 뭔가 달랐다. 따뜻해 보이면서도 말랑말랑해 보이는 비주얼이었다. 아니 먹을 수 없다.


또르띠야는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웠으며 스크램블 에그처럼 촉촉한 식감의 맛이었다. 마음 넓은 주인 분은 바게트 조각도 하나 같이 주셨다. 원래 이렇게 나오는 빵은 잘 손이 가지 않아서 안 먹는 편인데 수지가 (기쁨의 춤을 추면서) 빨리 한 입 먹어보라고 했다. 바삭- 한 입 씹으니 귀에서 요리왕비룡의 미미- 소리가 들렸다. 이건 진짜였다. 바삭하면서도 꾸덕꾸덕하고 촉촉한 게 너무 맛있었다.



가게 주인에게 이 빵을 직접 만든 거냐고 물으니 이 근처 빵집에서 샀다며 주소를 알려주셨다. 한 가지 문제는 우리가 온 길을 다시 거슬러 가야 한다는 거다. 이상하게 그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지 뒤를 돌아본 적은 없었다. 단순히 체력이 소진되었다거나 거리가 꽤 걸려서가 아니었다. '길을 돌아간다'라는 명제가 이 길에서는 어쩐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결정을 내리고 다시 서쪽으로 걸었다.


수지랑 나는 걸으면서 계속 빵 이야기를 했다. 바게트의 바삭한 겉표면, 와그작하면서 바스러지며 흩어지는 빵가루, 씹히는 빵가루 조각에서도 풍기는 고소한 곡물의 맛, 단단한 껍질 안에 숨겨진 뽀얗고 따뜻한 말랑말랑한 빵, 떡처럼 찰기가 느껴지면서도 부드러운 맛... 한창 이야기를 하다 말이 멈췄다. 말없이 눈이 마주쳤다. 같은 생각이었다.


'너두...?'

'야 나두'


우리는 오던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빵집 이름 : Panadería Puente de Villarente 구글맵

거의 9유로어치 빵 쇼핑을 한 곳. 구글맵 평점도 좋고, 낮인데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어요. 곱창 수프도, 츄러스도, 뭐든 다 맛있다고 하니 가는 길에 들러봄직한 맛집!






드디어 도시, 레온

오늘은 오랜만에 도시에 머무는 날이다. 이번 도시는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도시라 넉넉히 쉬었다 가기로 결정했다. 우철오빠와 S 언니도 여기서 만나고, 중간에 떨어졌던 웅민이도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 적어도 2박은 할 예정이기도 하고 사람도 5명이나 되니 알베르게에 머물지 말고 아예 넓은 에어비앤비를 빌려서 다 같이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우철오빠와 S 언니가 먼저 레온 에어비앤비에 도착하고, 나랑 수지는 바도 들르고 빵도 먹느라 거의 2시에 도착했다. 확실히 에어비앤비로 가니 느낌이 남달랐다. 알베르게에서는 내 뉘일 침대 하나와 공용 거실과 부엌이 전부였는데 여긴 내 침대도 있고, 내 방도 있고, 거실도, 베란다도, 부엌도 다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심지어 소리 나는 알람도 맞출 수 있다! (알베르게에서는 모두들 무음이나 진동 알람을 맞추며, 한 번 울리면 보통 일어난다)


여기는 도시라 배달이 가능하다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구글맵과 전단지와 번역기로 얼기설기 버거킹과 초밥집 주문을 해냈다. 배달원이 따뜻한 밥을 들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땐 거짓말 살짝 보태 눈물 날 뻔했다. 여태까지 아날로그적인 삶에 익숙해졌다고 자부했는데 도시의 문명은 지나치게 달콤했다.




바라왔던 소주 까는 날

우철오빠를 거의 처음 만났을 때였나 오빠가 소주를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든 짐을 1g이라도 줄이려는 이 길에서 액체로 된 소주를 이고 지고 걷는다는 거에서 대단했고, 그걸 한국에서 사서 출발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더불어 왜 나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스러웠다. 이야기를 막 들었을 때는 거의 순례길 초반이라 ‘신기하다’ 정도였는데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부러워졌다. 그리고 갈망했다. 뜯는 날에 꼭 우철오빠와 같은 숙소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결국 오늘이 그날이었다.


소주에 대한 예우로 우리는 고추장찌개와 삼겹살을 안주로 준비했다. 다들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고추장이나 재료를 아낌없이 찬조해 주었다. 그렇게 푸짐한 한 상이 완성됐다. 알베르게였다면 가스레인지 화구를 넉넉하게 사용할 수 없어서,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고추장찌개 냄새에 민감할 수 있어서 못했겠지만 여긴 에어비앤비라서 가능했다. 처음에는 '순례길에서 에어비앤비?'라고 생각했지만 전체 일정 중에 이렇게 하루 이틀은 분명 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심지어 소주는 한라산 올래였다. 한국에서는 저만한 용량의 페트를 소비하는 사람이 있을지 늘 갸웃하곤 했었는데 오늘에서야 저 병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저 작은 소주병은 이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이자, 혁명이며, 향수를 달래주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인 것이다.

*유치환,「깃발」


소주잔이 따로 없어 코냑 잔에, 올드패션드 잔에 각각 한 잔씩 노나들고 오늘만큼은 '첫 잔은 원샷'을 따르며 한 스냅에 털어 넣었다. 소주 특유의 작열감이 속을 후끈 데우며 단전에서부터 캬- 소리가 끓어올랐다. 얼른 고추장찌개를 크게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소주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는데 한국에서 마시던 관성을 이길 수는 없나 보다.  


소주로 시작한 술자리는 와인으로, 민트술로 넘어가 12시가 넘어까지 이어졌다. 내일 걷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였는지 술도, 음식도 끊임없이 들어갔다. 오늘 먹은 끼니로만 따지면 4끼다. 한국에서보다 더 잘, 많이 먹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술람찬 하루, 종종 잊는 것 같지만 여긴 분명 #산티아고순례길

 

열두시가 넘어서도 편하게 수다를 떨 수 있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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