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고속도로 행담도 휴게소.
손을 씻는다. 비누 거품을 다 헹구고 나서 다시 손에 비누를 묻혀 한 번 더 씻는다. 비누기가 다 없어졌음에도 헹구고 또 헹군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물기가 있는 손을 닦는다. 손가락 사이사이 작은 물기조차 남지 않게 꼼꼼하게 닦아낸 후 손에 핸드크림을 바른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오후의 햇살에 눈이 부시다. 최연지는 반사적으로 한 손을 들어 따가운 눈을 가렸고 잠시 후 밝은 빛에 눈이 적응이 되자 손을 거두면서 실눈으로 하늘을 봤다. 맑고 파란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하늘이 예쁘다. 예쁘다, 라는 말 말고 다른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잠시 넋을 놓고 하늘을 보다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얇은 연초를 입술로 물고 불을 붙인다.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뒷머리가 살랑살랑 날린다. 이정호는 연지의 옆에 두어 발짝 정도 떨어져 있다. 담배 연기를 피하기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쪽에 서있다. 연지는 깊게 한번 빨아들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바람을 타고 연기는 빠르게 흘러간다. 바람에 연기가 날려 바로 사라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녀는 담배연기가 자신의 앞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서히 흩어지는 걸 눈으로 보기를 좋아한다. 내면에 쌓여 있는 무엇인가가 몸 밖으로 빠져나와서 사라지는 기분이 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시적인 효과에 소소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바람이 담배연기를 빨리 날려버리지만 그래도 시원함을 준다. 시원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 파란 하늘, 훌쩍 떠나는 여행, 거기다가 정호와 함께 해서 좋다. 연지는 다리를 가볍게 들어서 발로 바닥을 몇 차례 쿵쿵 두들겨 본다. 바닥의 딱딱함이 발바닥에 그대로 전해진다.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서있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다.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휴게소 안팎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주차장을 들락날락하는 자동차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기 중의 수분에 담긴 염분 때문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도심보다 햇살이 훨씬 더 반짝이고 눈부시다. 정호는 말없이 담배 피우는 연지를 보고 있다. 설렘과 슬픔.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 두 가지의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묘하게 겹쳐 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서로를 향해 다정한 눈빛만 주고받을 뿐이다. 연지는 우울증약 복용을 중단한지 두 달 정도 됐다. 우울감이 완전히 없어져서 끊은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혼자 있을 때 문득문득 찾아오는 살기 싫다는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끊었다. 사실 예전부터 끊고 싶었고 의사도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어차피 우울증 약이 항상 듣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증약 없이도 견딜만하고 정호와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기까지 하다. 즐거운 기분 뒤에 낯설고 불안함이 붙어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무거운 바위에 마음이 짓눌려 있는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이런 가벼운 마음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담배도 끊을 것이다. 한 대를 다 피우었고 담뱃갑에는 마지막 한 대가 남아있다. 끊기로 한 김에 이것을 마지막으로 끊어야겠다. 이제는 굳이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걸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한 대만 더 피울 게.” 연지는 눈짓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정호는 눈웃음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들어 말없이 괜찮다고 했다. 그의 왼팔 팔꿈치 바로 위 삼두근에 Ars & Sciéntĭa 라고 문신이 새겨져 있다. 문신의 크기는 가까이 가서 확인하지 않는 이상 글자의 형태를 정확히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사이즈이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팔의 문신이 아주 잘 어울린다. 마치 그 문신이 새겨진 채로 태어났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의 눈썹은 짙고 양옆으로 길게 뻗었으며 쌍꺼풀이 없는 큰 눈에 매끈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을 지녔다. 잘 생긴 얼굴에 인상도 좋다. 일부러 살짝 헝클어트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으며, 아래위로 품이 큰 스타일로 세련되게 옷을 입었다. 계절에 맞는 시원한 향이 은은하게 그에게서 난다. 연지는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었으며, 갸름한 얼굴에 옅게 화장을 했다. 꾸미지 않은 듯한 옷차림이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흐른다. 정호는 왼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서있고, 연지는 마치 일부러 좌우 균형을 맞추려는 것처럼 꼿꼿하고 반듯한 자세로 담배를 피운다. 정호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이고, 연지는 단정한 느낌이다. 겉모습으로는 담배는 오히려 그가 피울 것 같고, 그녀는 피워 본 적도 없을 것만 같다. 두 사람은 분위기가 달라서 얼핏 보기에 연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담배를 다 피우고 쓰레기통에 꽁초를 버렸다. 연지와 정호는 아이스 카페라테 두 잔을 사서 차를 세워 둔 주차장으로 향한다. 한 손에는 각자의 커피를 들었고 다른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미끈한 곡선을 타고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중형 사이즈의 독일산 짙은 회색 SUV 자동차 앞에서 두 사람은 손을 놓고 갈라진다. 연지는 운전석 문을 열고 좌석에 털썩 앉았고, 정호는 조수석에 앉아 두 발을 서로 부딪치면서 신발을 두 번 탁탁 턴 다음에야 양 다리를 안으로 넣고 문을 닫았다. 두 사람 모두 커피를 컵 홀더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연지는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킨 후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린다. 차는 출발했고 목적지까지는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그녀는 한남동 집에서 출발해 방배동에서 정호를 태우고 목포로 가는 중이다. 오전에 전화 통화 중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가 목포에 아인슈페너가 맛있는 카페가 있다며 가보자고 갑자기 제안했다. 오늘은 한 달에 두 번 있는 쉬는 금요일이어서 연지는 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목포에서 다른 어떠한 것도 하지 않고 아인슈페너만 마시고 바로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목포에 가서 커피만 마시는 것은 누가 보아도 효율적이지 않다. 이러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 날도 연지는 회사를 가지 않기 때문에 목포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면서 즐길 수가 있다. 심지어 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기로 한 이유는 목포까지 가서 커피만 마시고 서울로 온다는 발상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떠한 이유는 없다.
자동차는 휴게소를 빠져나와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조금 전이 마지막 담배였어. 이제 끊으려고.” 연지가 말했다.
“오! 잘 생각했어. 그런데 바로 끊는 게 가능하겠어?”
“하루에 피우는 양이 많지 않아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연지와 정호는 마치 사전에 맞춘 것처럼 동시에 아이스 카페라테를 컵 홀더에서 꺼내어 한 모금 마신다. 특히 그녀는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시선은 전방을 주시한 채 오른손으로 컵을 꺼내어 입술로 빨대를 포갠 다음 길게 한번 빨아 마신 후 조금도 더듬거리지 않고 능숙하게 다시 홀더에 컵을 꽂았다.
커피를 내려 놓자마자 연지가 말한다. “커피가 진하지가 않아. 아무리 아이스 라테라도 맛이 너무 밋밋한데.”
“그러게 말이야. 많이 밋밋하다. 아이스 라테가 얼음이랑 우유가 들어가기 때문에 원래 그렇게 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실망이야. 대신 우리 목포에 가서 맛있는 커피 마시자.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건 처음이지 않나?”
“그러니까 항상 서울에서만 타고 다녔는데 이렇게 멀리 함께 가는 건 처음이다. 너무 좋아.”
연지는 잠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눈웃음을 보냈고 정호도 밝은 미소를 지었다. 자동차는 규정속도 내에서 빠르게 달려가고 있고 둘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서 그런지 두 사람 모두 고속도로 주변 풍경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아이스 라테 마시니까 우리 처음 만난 날 생각난다.” 연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