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Feb 22. 2024

인생의 위기를 맞았을 때 기억해 둘 한 가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에 시달릴 때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제가 오늘은 시간이 부족해서 예전에 집필했던  『그림의 말들』중 한 챕터를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에 올립니다. 새로운 글을 올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ㅠㅠ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대개 낯설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릴 때 사람들이 내뱉는 대사다. 내 정체를 잊을 만큼 당황스러운 상황에 매몰될 때 많은 이들이 중얼거리는 말이기도 하다. 가끔 생각해 본다. 이 웃기고도 씁쓸한 대사,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 속 문장에서 비롯된 말 아닐까.


리어왕은 원래 브리튼 왕국의 존귀한 권력자였다. 자신의 정체에 의문을 품을 이유라고는 없는 사내였다. 왕국을 딸들에게 나누어준 이후에도 오만함에 젖어 지내다 결국 모든 곳에서 내쫓긴다. 갈 데 없는 미천한 존재가 된 뒤 왕은 광야의 어둠 속에서 부르짖는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왕의 위풍당당했던 한 때와 비참한 처지에 놓인 시기의 모습 @ThoungCo


나 역시 가끔 “나는 누구인가”를 중얼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리어왕처럼 비장하게 부르짖은 건 아니고, 혼잣말로 힘없이 중얼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해외에서 지내던 때였다. 낯선 타국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상점에서 동문서답하거나, 집안에서 아이가 흘린 걸 주섬주섬 주우며 지내던 시절. 이따금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누구지? 대체 내가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알려줄 사람 어디 없나.


 한국에 살던 시기에는 품지 않았던 의문이었다. 교사, 직장인, 누군가의 친구, 동료. 리어왕처럼 세상을 발아래 둘 만큼 위풍당당하게 산 건 아니었으나, 나를 규정할 명확한 단어가 있긴 했다. 그 모든 게 공기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생활을 하며 생각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나를 둘러쌌던 언어를 잃은 순간. 누군가의 아이나 엄마, 아내, 이방인이라는 단어 정도가 나에게 남아 있는 전부였다. 처음으로 경계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정쩡한 위치임을 실감했다. 자신만만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정체감 혼란이 이어졌다.


 가끔 그때의 나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보았다. 아이를 낳은 후 사회적 생활을 중단한 채 고립감에 시달리는 주부들도 있었고, 퇴직이나 갑작스러운 실직 후 스스로를 설명할 명함이 없어 당황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거대한 고통에 직면한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지인은 자아정체감뿐 아니라 삶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고백했다. 예상치 못하게 커다란 병을 얻어 오랜 병원 생활을 시작한 친구 역시 비슷한 아픔을 겪는 중임을 털어놓았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가 해체되어 가는 통렬한 아픔, 허무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해체되어 가는 순간,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는 대표적인 풍경화 가다. 18세기 영국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14세 무렵에 이미 로열아카데미에 입학해 수채화를 배웠고,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스무 살부터 풍경 유채화를 그렸다. 24세 때는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입성했고, 그로부터 3년 후 드디어 1802년에는 정회원으로 선출된다. 빠른 출세의 길을 걸었던 그였다.



윌리엄 터너의 초상화(좌)와 그의 모습이 새겨진 영국의 20파운드 지폐(우. @changechecker.org). 터너는 현재도 영국인에게 널리 사랑받는 화가다.


프랑스로 건너가 타국의 문화와 자연을 체험하는 기회를 가진 후, 터너는 풍경화를 그리며 각광받는다. 터너의 작품 속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하는 대상이었다. 빛으로 가득 극적인 세계, 역동적이고 화려한 풍경이 담긴 작품이 탄생했고, 터너의 그림은 감상자들의 마음을 뒤흔들며 인기를 끌었다. 1804년, 서른 살가량의 젊은 나이에 터너는 이미 자신만의 화랑을 열어 많은 이들에게 그림을 주문받는 화가가 된다.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이었다.


윌리엄 터너의 <바다 위의 어부들>(1796, 좌)과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서부대철도>(1844, 우) @wikiart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터너가 자기 작품 중 어디에도 팔지 않겠다고 단언할 만큼 손꼽아 사랑했던 그림이 있었다.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1839)라는 작품이다.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1839, 윌리엄 터너) @wikiart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아래 배 두 척이 보인다. 불을 내뿜으며 앞서가는 작은 증기선이 관람자의 눈길을 먼저 끈다. 증기선 뒤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커다란 함선이다. 이 배가 작품의 주인공인 테메레르호다.


테메레르호는 한때 영국의 자랑거리로 이름을 날렸던 함선이었다. 영국 해군과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 군 사이에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한때 위용을 뽐내며 최고의 위치에 있던 전함에도 최후의 순간이 왔다. 산업혁명 이후 증기선이 개발되면서 함선은 효율성이 떨어진 배가 되었다. 터너는 쓸모를 다한 테메레르호가 해체되기 직전, 증기선에 의해 예인 되는 장면을 표현했다. 대영제국을 영광의 시대로 이끌던 함선은 이제 곧 산산조각이 날 예정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모습(좌)과 터너의 작품 속 테메레르호의 모습(우)


 터너에게 있어 풍경은 인간의 역동적인 감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테메레르호가 만들어내는 풍경도 그러하다. 두텁게 칠해진 하늘의 붉은 석양은 저물어가는 함선의 시대를 상징하는 듯하다. 뚜렷한 색채로 표현된 증기선에 비해 테메레르호의 모습은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답지 않게 힘없이 끌려가는 모습이다. 한 때 최고의 시절을 누렸으나 그 위용이 무색하게 내리막길을 걷거나, 세월의 흐름으로 노쇠해진 인간의 모습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릴 수 없다는 비애와 처량함, 한 시절이 떠나갔다는 감각. 그림 감상자들은 곧 해체될 함선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낀다.

 

 터너의 작품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2012년 작 「007 스카이폴」에 등장하기도 했다.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무기 개발자 Q와 비밀리에 만난다. 이때 두 사람은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가 걸려 있는 내셔널갤러리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벽에 걸려 있는 테메레르호를 가리키며 젊은 Q는 말한다. 세월 때문에 위대했던 전함이 불명예스럽게 끌려가는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세월이란 어쩔 수 없나 봐요.


내셔널 갤러리에서 <테메레르호의 마지막 항해>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제임스 본드와 Q  @네이버 영화

 

 테메레르호는 영화 속에서 노쇠한 사내가 된 제임스 본드에 대한 은유다. 한 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임무 실패와 젊지 않은 나이로 은퇴 위기에 놓인 제임스 본드의 처지와 테메레르호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만큼 작품 속 테메레르호는 지쳐 보인다. 곧 최후를 맞을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작품을 계속 감상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해체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그것을 반드시 함선의 최후로 봐야 할까. 제목과 달리 이 장면이 테메레르호의 끝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기의 끝은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게 마련이니까. 거대한 함선은 해체된 뒤 다른 배나 건축물의 재료, 땔감으로 쓰일지 모르지만, 이 과정을 통해 배는 또 다른 정체성을 얻을지도 모른다. 위용의 시대는 끝났으나 생의 겸허함을 배운 뒤 얻어낸 새로운 정체성. 어쩌면 테메레르호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지 모르겠다.




해체, 새로운 항해의 시작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를 보며 해체의 순간을 마주하는 인간을 떠올려본다. 누구나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시기를 맞는다. 영광까지는 아니라 해도 누구에게나 바쁘고 즐겁게 흘러가는 절정의 시기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즐거운 시기는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곧이어 어렵고 지난한 고통의 시기가 다가온다. 이전의 위치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글픈 마음이 찾아온다. 인생의 의미를 잃거나 정체감 혼란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만 다가오는 깨달음이 있다. 내리막길에 놓이면 인생의 사각지대가 사라지며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삶의 절정기에 알지 못했던 감각을 익힌다.


나 역시 그랬다. 머나먼 이국에서 경계인으로 지내며 체득한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좋다-나쁘다’, ‘훌륭하다-형편없다’로 분류 가능한 이분법의 세계를 살았다. 이제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들, 형편없어 보이나 훌륭한 것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과거에는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데 몰두하는 인간형이었다면, 삶의 느린 속도를 수용할 만한 겸허함도 익혔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외부 환경이 사라지니, 겉껍데기를 벗은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한 결과 ‘글 쓰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여전히 혼란 속에 있으나, 한편으로 ‘새로운 나’를 찾는 시간을 건너는 중이다.


그러니 기존의 나를 해체하는 과정이 서글픈 것만은 아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은 허망한 의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나를 잃어간다 생각할 때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니까.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파괴될 때 인간은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명함을 내려놓고 나에게 어울리는 역할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다.


자부심, 자신감, 위풍당당함. 나를 구성하던 입자가 허공에 증발해 버린 느낌에 휩싸이는 순간, 익숙했던 나와 이별을 고해야 하는 순간, 해체의 순간은 아플 수 있지만 새로운 기회다. 혼란과 허무한 감정에 매몰되어 좁디좁은 세계를 살 것인지,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며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볼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수 있다.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유랑선생입니다.

 출간했던 책(그림의 말들)에 추가 원고로 실었던 글을  올려요;;; 오랜만에 명화 이야기를 발행합니다. 해외 살이 속에 아이 기르며 정체성 혼란에 빠지고 마음이 부유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삶의 주변부에서 서성인다는 느낌,  경계인이라는 감각이 서글프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시기에만 다가오는 깨달음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 근황을 말씀드리자면,  예전 글말씀드렸던 대로 3주 전과 2주 전에 청소년 원고 마감을 하나씩 했어요. 지난 주에도 앞으로 들어갈 원고 작업을 위해 샘플원고 (본격적인 집필 전에 편집자분께 보내어서 원고의 전반적인 방향을 살펴보고 피드백을 받기 위한 원고입니다)를 하나 완성해 보냈는데, 다음 주초까지 또 다른 책의 목차랑 샘플원고 를 편집자님께 하나 더 보내야 하는 상황이에요.  


 보통 원고 마감이나 샘플원고 보내는 일이 이런 식으로 겹치진 않는데, 어쩌다 보니 한꺼번에 일이 밀려올 때가 있더라고요. 방학 때 원고를 되도록 많이 써두어야 할 처지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 모든 게 제가 벌인 일이라 스스로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제 자신에게 화가 나서 '너 정말 도라이(!!)니?!'라고 (속으로) 소리를 지를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흥미로운 원고를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일이란 생각도 들고... 자아분열처럼 스스로에게 화를 내다가 만족하다가 다시 화를 내는 식으로 마음이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잠을 줄이며 글을 쓰다 보니 건강상태도 썩 좋지 않단 느낌이 있고,  개학을 앞두고 걱정과 불안이 최고조가 된 상태 ㅎㅎ 이기도 해서 오늘은 예전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하단 말씀 다시 한번 드립니다. 모쪼록 2월 즐겁게 마무리하시고 아직 날이 스산하지만 건강한 한 주 보내시길 바라요. 다음 글은 3월 1일(목)에 발행할 예정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역삼도서관에서 <그림의 말들> 강연을 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