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글을 좋아했다. 브런치에서 알게 된 작가님이었다.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이야기도 잔잔하고 담백하게 풀어냈던 '말기암환자의 독백'이라는 브런치 글들이 이번에 새벽 4시, 살고싶은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되어 나왔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서둘러 컴퓨터를 켰다. 작가님이 써내려간 문장과 문장을 읽으며, 참 많은 것이 비슷하고, 참 많은 것이 다르다고 느꼈다.
같은 국제개발협력 업계에서 일한다는 것, 사람을 돕고 싶어서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는 것. 영국에서 개발학 석사 공부를 했다는 것, 그리고 개발학으로 박사학위 입학 허가를 받았다는 것. 계획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다이어리는 매일 빠지지않고 쓴다는 것. 쉬는 것을 못견뎌 해서 시험공부라도 한다는 것. 자신에게 주는 선물은 대부분 책과 시험응시권이라는 점까지. 공통점이 참 많아서, 이전에 만나봤으면 참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라도 그녀를 알게되서 너무 좋았다.
죽음을 유달리 무서워하던 10대였다. 삶이 유한하고, 죽음을 피할수 없다면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신을 믿을 수도있겠고, 자식을 낳는것도 하나의 방법일테다. 또 다른 나를 세상에 남기는 방법이니깐. 나는 다른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고싶었다. 내가 터무니 없는 이유로 죽어가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혹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나 개인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게 아닐꺼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회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교 내내 사회운동을 했고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대학교때 복수 전공을 시작했고 비슷한 결을 가진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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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십대는 내내 '사회, 정의, 공정, 평등, 평화' 등의 단어들로 이루어진 대화가 계속되었다. 그런 대화로 가득차있는 삶을 살다 문득 감출 수 없는 피로감을 마주했던 순간이 있다.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울타리'와, '성벽', '국경'을 지나 우리의 삶 속에도 자기반성이나 지가성찰을 찾아보기 어려웠을 때, 나는 모든 것이 견딜수 없이 피곤해졌다. 싸워야할 상대와 이겨야할 상대가 있는 게임 속에서, 이 단단한 구조속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피해자이기만 할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수익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는 것일까.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고민할 필요없는 싸움만 해나가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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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10대때 했던 생각과 20대때 했던 경험들이 나를 국제개발협력 분야로 이끌었다. 유엔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일 하시네요."
하지만, 가끔은 일은 일이고, 직장생활은 비슷한 직장생활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서, "아! 오늘도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볼까?" 하지않는다는 이야기다. 가끔은 그냥, 안정된 직장에, 안정된 봉급을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런 일을 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지난 열흘간 야근을 하면서, 똑같은 의미의 문장을 썻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사명감은 아침, 점심, 저녁 단 한번도 내 삶에 있지 않았던 것 처럼 느껴졌다.
근데 이 책 속의 작가는, 그녀는 나와 달랐다. 여전히 가장 소외받는 이들을 생각하고, 가슴아파하고, 그들을 위해 살고 싶어했다.
나에게 '가장 소외받는 이'들은 페이퍼에 쓰는, 보고서에 쓰는 하나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되지 않았나, 고민하다가 그런 고민마저도 옅어졌을때 읽은 그녀의 글을 읽었다. 그녀의 글은, 그리고 그녀의 열정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물론 그녀가 불편한게 아니라 내가 불편해졌다는 거다. 나는 어떻게 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가.
자주 아팠다. 몸이 워낙 약하고, 체력이 약했는데 최근 큰 수술을 받고나서는 더 체력이 약해졌다. 체력이 약하면 자꾸 쉽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받았을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으니. 일을 하면서 나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집에 돌아오면, 손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다음날 출근하기 일쑤였다. 세상을 구한다면서, 혹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한다면서, 자기 삶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것들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하지 못해서 외주를 주는 삶을 살면서 회의가 느껴졌던 것 같다. 빨래도, 청소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사람을 쓰고. 외국에 나와서 살면서 일에 치여서 정작 가까운 사람들의 곁을 지키지 못하고. 사실 그러면서였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이 든 것이. 정의와 대의, 그러한 뜨거운 것들이 과연 내 삶을 채워줬던가. 결국 지금의 나를 있게 (살게) 해준 것들은 곁을 내어던 사람들과 사소한 일상들이었는데 그러한 사람들과 일상들을 챙기지 못하고 사는 지금이 어떤 의미일까.
여전히 어렵다.
<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