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과 똥고집은 본질 차이

by 무기명

종이컵은 모순성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어쩌면 한계를 극복한 용어라고도 볼 수 있다. 물에 젖는 종이가 물을 담는 컵이 될 수 있다는 건 물성의 원리를 거절하는 모순이 아니라면 종이라는 한계를 이겨낸 케이스다. 또 종이컵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표현해주고 있다. 일회용 컵이 가진 역할. 물을 마시기 위한 도구는 기본이고 어쩌면 빵이나 떡을 덜어 먹을 수 있는 접시가 되기도 한다. 종이컵은 일회용 접시로서의 예상치 못한 쓰임을 당한다. 우리는 종이컵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벼움의 무게와 마찬가지로 종이컵을 대할 때랑 동일한 마음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유리컵이었으면 하지 않을 수많은 행동이 있다. 누가 종이컵을 퐁퐁 가득 묻혀 설거지를 하겠는가. 형태로서의 컵의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종이컵은 물을 담고 있지만 물에 닿으면 쉽게 흐물거린다. 겉까지 물 한 방울 스며들 틈도 없이 코팅되어 있는 종이컵은 더 이상 종이컵이 아닐 테다. 경제적으로도 의미 없는 도구로 전락할 테다. 종이컵은 그런 허점을 갖고 있어야 종이컵일 뿐이다.


생수병도 마찬가지 아닐까. 에비앙이 아닌 이상 누가 브랜드가 크게 박혀있는 생수를 마시고 싶어 할까. 사실 그 누구도 큰 관심은 없을 것 같다. 구매 요인에 절대 해당되지 않을 것 같지만 매대에 물이 두 가지가 있다면 어떤 걸 마실지는 감히 추측해볼 수 있을 테다. 같은 브랜드, 같은 가격, 같은 용량, 같은 위치의 생수가 있다. 단지 다른 점은 생수병 위에 있는 라벨의 있고 없음.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생수는 어떤 것일까? 감히 추측해보자면 무라벨일 테다. 누군가는 환경보호를 위해 택한다고 하겠지만 내가 무라벨을 택하리라 추측한 이유는 단순성이다. 목마른 사람은 물이 생각날 것이고 편의점에 들러 매대 앞에 서 있다. 자신의 갈증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시원하게 외치고 있는 생수 표면의 외경에 자연스레 눈길이 갈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이 물의 수원지는 어디고 취수는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를 조그마한 글씨로 빼곡히 적혀있는 라벨을 고르겠는가. 투명한 물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무라벨을 고르겠는가. 이런 생수병에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는 라벨 디자인의 고도화, 생수병 윤곽을 세계적인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수병은 생수병의 역할만 하면 된다. 떨어뜨려도 물이 새어 나가지 않는 정도의 견고함과 물을 잘 보여줄 투명도만 잘 유지하면 된다. 생수병을 도자기 공예 하듯 장인정신까지 깃들여 만들 필요는 너무 과분한 행위이다.


디테일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디테일을 논할 수 있다는 건 그 분야의 전문성이 있다는 것일 테니까. 또한 일반 사람을 쉽게 캐치하지 못할 디테일한 구성은 결과론적으로 어떻게든지 그 누구에게든지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다. 완벽주의자를 존중하고 디테일에 안일한 사람을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디테일은 어쩔 땐 똥고집이라 불리기도 한다. 손톱과 발톱을 깎을 때의 디테일과 TVCF 온에어 전 오타를 검수할 때의 디테일은 다르다. 같은 디테일의 단어를 입었지만, 깊이가 다르다. 한 제품의 본질에 가까운 디테일은 장인정신의 고집이고 본질에 먼 디테일은 똥고집이라 불릴 수 있다. 고집과 똥고집은 본질과의 거리로부터 결정되더라. 초심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모든 사람이 알듯 시간이 지나도 본질을 잊지 않고 방향성을 견고하고도 유연하게 지키는 건 정말 대단한 거다. 결국 종이컵이나 생수병이 도구의 본질을 충실히 지키며 일회적인 의미로서의 최선치를 다할 수 있는 디테일을 유지하는 게 최선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회성 속에서 펼칠 수 있는 최선의 연속성. 이를 발견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은 어떤 일을 하든지 꼭 필요한 역량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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