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 아자 발아하자

by 무기명

식물 키우기는 실전이다. 게임 속 캐릭터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죽으면 다시 살려내고, 광고를 보고 보너스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다. 게임 속 캐릭터는 오랫동안 로그인을 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반대로 본인이 시간과 돈을 투여한 만큼 캐릭터의 힘은 강력해진다. 일정 부분 비례성을 지니고 있다. 식물에 부여하는 시간과 돈의 투자는 그들 자체의 생산성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지만 한정적이다. 잘 키우자는 마음에 물을 과하게 주거나 영양제를 과입하거나 온실 속 화초처럼 지극정성 키워도 식물의 생기는 정해져 있다. 먹이를 과하게 먹으면 살이 찌는 우리 동물들과는 다른 체질이다. 이렇게 식물을 키운다는 건 과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 기상청도 예측하지 못하는 날씨의 변측성은 식물 키우기에 큰 난관에 속하기도 한다. 한강의 라면 기계가 정확한 시간과 물의 양을 맞추며 라면을 끓이는 것과 달리 식물에 500ml의 물을 줘야 하는지 몇 날 며칠에 햇빛을 마주하게 해야 하는지 등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 그날의 건조함, 그날의 온도, 그날의 햇빛에 따라야 한다. 어쩌면 정확함과 규칙성이란 사고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식물 키우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처럼 유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건 확실한 방법일 테다. 식물은 기계가 아니니까.


집 안에 화초가 여러 가지 있다. 천장에 닿을락 말락한 식물은 소파 옆에 자리한 지 꽤 오래되었고 선인장과 식물원에서 볼듯한 귀하게 생긴 다채로운 식물들은 햇빛 일등석에 비치되어있다. 친절하게도 식물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같이 심어져 있다. 하지만 내가 이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못하고 식물을 식물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다. 가끔 새로운 꽃이 들어오면 어머니께서 이쁘지 않냐 물어보실 때가 있는데 매번 그들을 마주치긴 하지만 그사이에 팻말에 적힌 이름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거실 옆 베란다에 수많은 식물과 살아가고 있지만 거실조차도 가끔 나가보는데 어찌 베란다에 식물을 눈에 담을 수 있을까. 외면할 마음은 없다. 현관문을 향할 때 가끔 햇빛 스포트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식물들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예쁘다고 생각했을 테니 이렇게 기억 속에 잔존해있을 것이다. 집안에서 어머니의 지극정성이 뚜렷하게 반영되고 있는 건 베란다 속 화초일 테다. 갑자기 추워진 요즘 어머니는 롱패딩을 꺼내는 것보다 먼저 화초들 위에 비닐을 씌우셨다. 진짜 온실 속 화초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 덕에 어릴 때부터 자주 식물원에 갔던 기억이 있다. 직접 목격했던 수많은 식물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미모사'. 툭 건드리면 움츠러드는 잎들. 식물이 움직일 수도 있는 생명체임을 눈으로 본 첫 날이다. 물론 식물들은 고정된 생명체가 아니다. 해의 위치에 머리를 향하고 있는 해바라기처럼 제각각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애국가를 제창했더라면 모니터에서 볼 수 있는 개나리나 진달래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테다. 식물은 순간을 위해 살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피어나기 위한 발아를 준비 중이고 연속적으로 살아가는 걸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식물에게도 배운다. 순간보다는 연속성의 삶을 방향성으로 잡아야 한다고. 순간의 기쁨보다는 삶의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모든 식물이 미모사처럼 순간에 반응하지 않듯 우리가 맞이할 순간의 순간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느림의 미학을 지닌 해바라기나 씨앗의 발아처럼 남들에겐 보이진 않는 곳이라도 꾸준히 언제든 발아를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걸 배운다. 시멘트를 뚫고 올라오는 나팔꽃이 되든, 언덕을 꽃들로 뒤덮은 군중 속의 장미가 되든. 미래의 구체성을 항상 다짐한 채 피어올라야 한다. 결국 달성해도 어떻게 피어올랐는지 그 노력의 모습으로 다른 결과물과 차별점을 가질 테니 우린 우리만의 모습으로 솟아올라야 한다. ‘힘내자’를 식물들의 언어로 하면 ‘발아하자’이지 않을까. 솟아오르는 식물을 본받아 우리도 힘껏 발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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