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진력, 추리력, 상상력, 기억력 그리고 달력

by 무기명

달력엔 힘이 있다. 다음 해의 달력을 받을 땐 내년의 삶을 더 알차게 살아보고자 하는 힘이 생기기도 하고 빠른 속도로 달력을 넘겨가면서도 동시에 누적되고 있는 힘도 있다. 눈에 걸리는 빨간 날을 마주칠 때마다 연차와 휴가를 계획하고 있는 그 추진력과 상상력이 그 힘이다. 달력의 처음과 끝이 갖는 힘의 의미도 다르다. 새해 다짐과 같은 미래지향적이자 낙관적인 힘의 1월. 과거를 회상하고 가끔씩 따가웠던 기억도 더듬어보고 세월의 빠른 흐름을 한탄하기도 하는 등 차분함 머금고 있는 12월의 힘. 그 둘의 온도는 같은 겨울이지만 시작과 끝이라는 단어의 온도를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달력엔 추진력이 있다. 텅 빈 달력을 보면 왠지 모르게 채워놓고 싶은 갈증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공백을 메꾸는 용도로 약속을 잡진 않겠지만 어쩌면 공백이 갖고 있는 무언의 힘이 있다. 괜히 연달아 비어있는 주말의 일정은 이번 기회에 자기계발이라도 해야 하나란 생각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비어있는 달력을 채우기 위해 덜 채워져 있는 역량을 찾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1월만 되면 수많은 자기계발 계획을 세우는 걸까. 텅 빈 달력이 주는 작지 않은 불안감에 힘입어 본인의 역량을 키워줄 수 있게 추진력을 발휘하게 된다.


달력엔 추리력도 있다. 12월쯤 되면 회사에서 달력을 배부한다. 제발 빨간 날이 평일에도 두루두루 있길 바라며 1월부터 차근차근 넘긴다. 생각보다 빨간 날의 활약이 부진할 때 지극히 소망적인 행복 회로를 원천으로 한 추리력이 발산된다. “아… 어린이날이 주말이네? 그럼 대체공휴일이 금요일일까 월요일로 해주겠지? 아님 회사에서 센스 있게 단체연차를 마련해주지 얺을까? 그렇게 되면 휴가는 이때 사용하는 게 알짜배기겠다.” 휴가와 연차를 더 알차게 쓰기 위한 추리력이 모습을 보이지만 그 힘은 얼마 가지 않는다. 항상 예상과 어긋나는 단체연차의 통보와 대체공휴일에게 느끼는 배신감만큼은 신기하게도 미리 추리하진 못한다.


달력엔 상상력도 있다. 달력을 받은 지 10분도 안 되어서 벌써 부산행 비행기를 탈 준비까지 할 수 있다. 상상은 자유니까. 마음만으로는 휴가 결재를 올려놓았다. 상상은 끝도 없는 상상이니까. 작년엔 미국을 갈 생각까지 했으니 국내여행 정도야 가뿐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여자친구의 생일, 가족의 기념일의 모습도 그려진다. 그날이 평일이냐 휴일이냐부터 확연히 차이 날 것이다. 각각의 기념일을 기입함과 동시에 그날의 내가 어디쯤 있을까 상상해 본다. 사무실만 아니길. 방구석이어도 좋으니 회의실만은 아니길. 기념일만은 당사자와 축하할 수 있는 환경이길 바라며 달력을 제자리에 놓는다.


달력엔 기억력까지 있다. 카톡 대화 기록처럼 지난 달력을 보면 그날의 일이 기억난다. 세세한 그날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월이 바빴는지 한가했는지 달력을 복기하다 보면 한눈에 보인다. 정사각형의 틀 안에 적힌 여러 일정들이 꽉꽉 채워져 있거나 중요한 일정을 표기하는 표식인 형광펜이 빈번히 보인다면 정신없었던 그 달의 기억들을 읽는 것 같아진다. 검은색의 글씨로 가득한 일정들은 이제 생명력을 다해서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자일 뿐이다. 그렇지만 달력이 검해질수록 무언가를 한 거니까. 필기한 만큼 메모한 만큼 실력은 오를 테니까. 달력 덕분에 지난해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