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두 가지로 나뉜다. 듣기 좋은 소리와 듣기 싫은 소리. 듣기 싫은 소릴 우린 다음과 같이 부른다. 소음. 또는 잔소리. 조언이란 포장 속 오지랖. 대게 소음을 기피한다. 딱딱한 플라스틱과 손톱과 부딪혀 나오는 소리조차 듣기 싫은 나머지, 인간은 무소음 키보드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무소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에만 적용이 가능할듯하다. 뇌를 거쳐 나오는 언어의 옷을 입은 소음은 TV 볼륨처럼 음소거 시킬 수 없다. 상대가 말하는 중간에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쓰는 것도 대화를 끊을 수는 있어도 무소음으로 전환할 수 없다. 생각해보니 소음을 막을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자체적으로 노이즈캔슬링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무언가에 집중하고 몰입한 경험이 있을 테다. 음악을 들으며 무언갈 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음악이 들리지 않는 그런 경험. 소음이 들리면 몰입해볼까? 저녁에 바삭바삭한 치킨 먹을지 부글부글한 국밥을 먹을지.
실제로 노이즈캔슬링의 원리는 소음으로 소음을 막는다고 한다. 외부와 내부 소리의 균형이 일치하게 될 때 멍하게 되는 묵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외부의 소음도 일정 부분 무소음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소리 (예측 불가한 오지랖)은 평생 어쩔 수 없는 소음일까? 잔소리의 볼륨을 0으로 할 수 있는 건 겨우 말대꾸일 뿐일까? 결국 말대꾸도 누군가한테는 소음이 된다. 제삼자가 봤을 땐 소음 더하기 소음일 뿐. 본인의 찝찝한 마음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순 있어도 다른 측면에서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라는 벽이 있는, 직급이란 층이 있는 이 층간 소음은 어찌 극복해 나가야 할까.
구교환 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엄청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이옥섭 감독이 너무 좋은 조언을 해줬다. 그 사람을 귀여워해 보라고 하더라.” 싫어하지 말고 귀여워하라. 소음을 음악으로 바꿔보라는 것. 잔소리를 조언으로 들어보라는 것. 아니 애초에 조언으로 듣는다면 (물론 조언이 아닐지라도) 다 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 아닐까? 좋게 생각한다는 전제하에라면, 귀를 찌를 듯한 고음으로 화를 내지만 않는다면 차분한 잔소리는 어쩌면 조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말은 쉽다. 막상 소음을 맞닥뜨리면 나를 위한 조언이라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옥섭 감독도 어려웠을 테다. 그래도 그녀는 ‘이제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어렵겠지만 조금씩. 가끔이라도 소음의 조언화 과정을 거쳐 간다면 언젠가는 바뀔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귀를 닫는 순간 마음도 닫히게 되더라. 마음이 닫힌 사람은 조언을 들어도 잔소리로 전환할 가능성이 크다. 음식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다면 그 음식 자체가 더럽고 못 먹는 것이 되어버리듯 미운털이 박히게 되면 그 넓고 넓은 범위를 다 무시한 채 미운털만 보게 된다. 그런 미운털마저 귀여워할 준비가 되었는가. 솔직히 이미 생겨버린 미운털들을 모두 제거하는 건 이상적인 해결 방법이다. 이상적인 만큼 현실적으론 힘들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미운털 이식을 중단하자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미운털 대신 귀여운털(?)을 심자. 자체 필터링의 효과로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 스트레스도 줄이고 잔소리는 없애고 조언은 많아지고 얼마나 좋은가. 다가가진 않아도 된다. 마음을 열어보자. 팔을 벌려 포옹해보자. 미운털과 소음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