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의 이중성

by 무기명

만족은 이중성을 지닌 단어이지 않을까. 만족할 줄 아는 것만 해도 본인이 하는 일의 가치와 힘듦을 공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 만족의 대상에 대한 기대감과 몰입감이 엄청나 이를 받아줄 만한 성취감이 와닿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를 욕심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욕심은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결과물에 만족하는 순간 손을 놓아버리는 게 익숙해지면 다음 결과물의 완성도는 이전의 만족감과 유사한 크기일 뿐이다. 만족의 연속은 일종의 노하우로 귀속되어 만족감을 얻는 과정의 지름길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보고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고인물이라 부를 수도 있다.


지금은 다른 회사로 이직했지만, 예전 사수가 조언해준 게 있다. 본인 아이디어가 잘 팔렸다고 해도 만족하면 안 된다. 다음 회의 땐 하나도 못 팔 수도 있고 자만에 빠지게 되면 어느새 고집이 된다고. 회사 초창기 시절이라 조그마한 아이디어가 채택되기만 해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때였는데 시의적절한 조언이었다. 심지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네가 선을 행했고, 다른 사람이 너의 그 선행으로 유익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왜 너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사람들이 너의 선행을 인정해 주거나 어떤 보답을 해주는 것 같은 다른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만족감이 깊어져 자만감이 되면 끝없는 자랑을 하고 싶어진다. 본인 업적에 심취해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게 되고 그걸 꼰대라고 부른다.


항상 다짐한다. 만족하는 건 그날 그 시간만 즐기자고.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여자친구와 저녁을 먹을 때 입이 근질거린다거나 다음 회의 준비할 때 지니는 마음가짐을 보면 아직 사회적으로 어린 게 티가 난다. 그래도 메타인지는 하고 있으니까 계속 반복적으로 되새김질해야겠다. 방금 생각해본 건데 하나의 루틴을 만들면 어떨까 싶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태도는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고 자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만큼은 충분히 말하고 자랑해보자. 상대가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술이나 저녁을 사주면서 잘난 체 시원하게 해보자. 적어도 친한 친구들이니까 자랑하는 말의 대답은 “어쩌라고” 일 테다. 자랑을 부추기는 대답을 하는 착한 지인들에겐 자랑하지 말자.


그러고 나선 분석해보자. 어떤 이유로 잘 팔릴 수 있었는지, 다른 팀원의 아이디어는 어땠는지, 어떻게 인사이트를 도출해냈는지. 본인이 부족한 게 뭔지 분석하다 보면 사실 끝도 없이 나올 테다. 완벽하지 않은 카피와 비주얼의 매치라던가. 팀원들과 디벨롭하는 과정에서 바뀐 카피를 보면서 왜 원래 안에 있던 카피가 살아남지 못했을까 생각해보자. 광고주에게 보고하는 결과물은 사실 팀원의 결과물이니까 본인이 단초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단초의 결과는 오로지 내가 탄생시킨 게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굳이 내가 자랑할만한 건 없게 되는 듯하다. 단초를 제공했다 뿐. 단초를 제공하는 것도 사실 자랑할만한 소재는 아닌 듯하다. 자랑을 본인 입으로 하는 것보다 더 멋있는 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전해 들을 때다. 우린 그 칭찬을 들을 땐 마음껏 만족해야 한다. 포만감 가득한 만족감을 유일하게 느껴도 되는 순간. 나에게도 이런 만족감을 느기는 순간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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