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칠 수 있는 관계는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일 테다. 어른이든 아이든지 장난기 있는 모습은 늘 생기를 띠고 있다. 언제 발산될지 모를 그 생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면 금방이라도 웃음이 튀어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장면들로 이뤄진다. 광대가 돌출된 채 이어지는 대화의 티키타카. 장난의 종결은 ‘잠시 정적’으로 이뤄진다. 정적을 마주하는 순간은 이럴 때다. 웃음으로 뒤범벅된 티키타카를 하다 보면 누군가가 그들이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수위의 마지노선을 침범하게 되고 주위의 야유로 일단락되는 장난은 그렇게 휘발된다. 어쩔 땐 야유는 더 큰 부정의 상황을 예방해 주는 기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우린 왜 장난을 ‘-친다’라고도 할까? 장난은 ‘-한다'로만 포용하기는 부족해 보인다. 상대의 감정을 시각화시키기엔 최고의 장치이지 않을까.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에 보조개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신경질의 강도를 드러내는 미간의 주름이 더해지는 걸 볼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선 ‘사고친다’의 맥락과 같을 것이다. 눈치를 빼먹은 장난은 잦은 빈도가 되면 사고에 가까워진다. 사고가 되는 순간, 장난은 장난이 아닌 시비로 둔갑해버린다. 장난이라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오는 메아리는 시비일 뿐이다. 그렇다면 수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건 둘 모두에게 속하는 말이다. 수습하기는 힘들다. 젖은 물은 뜨거운 바람의 드라이기로 말리던가, 저절로 증발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결국 만능 해결사인 시간이 해결해 줘야 한다.
장난의 어원은 作亂[작난]이라고 한다. <주희>에 따르면 작난(作亂)이란 패역하고 투쟁하는 것을 말한다. 장난은 상대방으로부터 웃음을 일으키거나 화를 돋우기도 한다. 그 사람의 감정의 텐션을 높일 수 있는 장치라는 건 명확하다. 투쟁에 실패하면 온전히 돌아오는 타격감처럼 장난도 그렇다.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에게는 웃지 못할 비방과 야유가 쏟아지는 현실이다. 그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는다. 스탠딩 코미디를 보면 여실히 나타난다. 웃긴 코미디언에겐 박수와 웃음을 아낌없이 주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적과 비웃음뿐이다. 웃음에 관대하거나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는 사람들에게도 정색하는 장난이 있고 선을 넘은 장난은 본인에 대한 상대의 작난(作亂)으로 받아들여진다. 장난에 일방통행은 없다. 역시 장난도 공감대를 건드려야 한다.
장난기를 표정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비교적 어려 보인다. 연예인으로 치면 신동엽님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실제로 자주 웃는 사람들이 동안으로 보인다고 한다. 대칭적으로 올라간 입술 꼬리를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주위에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보면 미소 짓다가 입에 경련이 일어났다고들 한다. 평상시에도 ‘개구리 뒷다리~’를 말하면서 웃는 걸 연습해두라던 상사의 말에 ‘에이 그날은 행복한 날인데 항상 웃지 않겠어요?’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건 이후로 연습의 필요성을 뉘우쳤다. 갑자기 지면촬영의 모델이 되었던 적이 있다. 지면광고 시안으로 제작하는 거라 일반 모델을 섭외해도 무관했고 진행비가 없는 상황. 아트디렉터 부장님은 나를 바라봤고, 내일 아끼는 신발 신고 오라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설마 진짜로 찍겠어?’란 생각으로 평상시같이 출근했는데 어느새 난 촬영장에 도착해있었다. 물론 얼굴은 보정하겠지만 미소와 인상은 내가 만들어내야 했다. 그때 촬영 시간이 별로 되지도 않았는데도 경련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큰일 났다 미래의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