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알 수 없어도 계획은 할 수 있으니까

by 무기명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한 달에 3번 정도 만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노는 건 다 똑같다. 밥과 술 그리고 여행. 술에 꼭 필요한 안줏거리인 스몰토크로 뒤범벅이 될 때쯤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는 꼭 미래 계획이란 안건을 던진다. 그것도 갑자기 존칭을 쓰면서. “OO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건가?” 영화 성대모사를 잘하는 그는 누아르의 한 장면처럼 대사를 던진다. 동시에 상대의 인생을 시험하는 면접자의 표정을 앞세워 본인의 뒷배경인 술집 네온사인을 흐릿하게 조성한다. 그 친구는 가끔 정적이 오래간다 싶으면 꼭 향후 인생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럴 때마다 난 메크로를 입력해놓은 것처럼,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는 포부가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 “아무래도 광고업에 발 들였는데 탑티어는 찍어봐야지.” 반올림해서 겨우 2년차가 된 사람의 건전한 포부다. 그 친구가 반복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본인의 미래 계획에 대한 구체성은 뚜렷하지 않아 보인다. 지금 하는 일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지 심사숙고하고 있는 친구는 미래 계획 안건에 침묵을 보였고, 금융업계 취업 준비생인 다른 친구는 그냥 후딱 취업해서 돈 벌고 싶다는 넋두리를 풀었고, 마지막 질문을 한 친구에게 그럼 너의 계획은 뭐냐고 묻자 회사를 때려치우는 것이라고 한다. 일을 하면서 이게 맞나란 의구심이 든다고. 제약회사 친구는 하나는 확실하기 때문에 미래 계획에 진지한 편이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확신. 하지만 어떤 일이 자기의 길이 될지는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공감해줄 사람을 찾고 얕게라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미래 계획이 확실한 사람의 과정을 보고 배우려는 마음이지 않을까.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말하고 싶다. 이미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라고.


자신의 미래 계획을 회사에 가둬두고 싶지 않다고 했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만나기 전, 난 이런 말을 하고 다녔었다. “광고업 다 찍고 나선 넷플릭스에 가보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대표성을 띠고 있는 곳에 다녀보고 싶다.” 여전히 회사란 틀을 유지한 내 최선치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본인의 미래 계획은 회사에 가둬두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고작 회사란 것에 미래 계획을 건다는 건 인간 그 자체로서 최대치의 결정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회사는 사회적인 꿈의 집결지 아닌가. 주체로서의 내가 진정 원하는 미래 계획을 찾아가는 과정이 살아간다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넷플릭스에 취업하고 싶다던지, 광고회사 탑티어를 찍어보겠다던지가 아닌 본인만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머리를 부여잡으면서까지도 인내와 고통을 겸비한 그 과정까지 즐거워하면서 이뤄내고 싶은 것이 내 미래 계획으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짜 내 미래 계획은 뭘까. 무엇이 되었든 글과 관련될 것 같다. 활자 중독은 아니지만, 글을 좋아하고 문장이 지닌 힘을 믿고 있다. 대학 시절엔 철학적 논제, 가령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논문 및 철학책 몇 권을 읽어야 했고 관련 강의도 몇 차례 들어야 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한 문장이 펼칠 수 있는 힘의 영향력이 막대한 건 이미 느꼈었다. 또 훈련소 시절 허리가 아픈 동료들의 회복을 위해 명백한 쉬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누워서 쉬지 못하게 하는 환경에 고충을 토로하는 몇 문장. 글로 누군가의 불편함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목격했었다. 내 글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가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지만 누군가가 읽고 공감하고 좋아하고 또는 싫어하는 그 순간들을 마주하고 싶다. 꼭 이름이 기재된 책을 낸다는 게 목적은 아니다. 누군가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는 게 미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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