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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May 26. 2021

당신의 홀로서기, 안녕하신가요?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1인 가구]


연령대에 관계없이 1인 가구 수는 점차 늘고 있다. 비혼이나 무자녀를 선호하는 젊은이들, 평균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홀로 남겨지는 노인들, 연령에 상관없이 증가하는 이혼의 수 등의 이유로 1인 가구의 형태와 종류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이에 발맞춰 홀로족들을 위한 식당, 노래방, 술집 등이 늘면서 혼밥이나 혼술 등의 문화 또한 점차 당연한 것이 되어 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혼밥이나 혼영이 일상이었던 나를 주변에서 신기하게 여기며 외롭지 않냐는 질문과 용기 있고 대단하다는 말들을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어 왔음을 느낀다.


지방보다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1인 가구의 증가는 개인주의가 중심이 되는 사회, 문화적 변화를 반영하는 당연한 결과지만, ‘사회적 고립’이라는 문제를 낳으며, 다른 사회적 문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고립]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엄마와 아빠는 이웃집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음식은 나누어 먹으며, 소위 ‘이웃집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 알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파트의 시대가 찾아왔을 때에도 최소한 위, 아래, 옆집에 누가 사는지 정도는 알고 지냈던 기억이 있다. 어른들은 이런 관심을 ‘정’이라 표현하며 친척 간 혹은 이웃 간의 정이라고들 말하지만, 그 지나친 관심을 온전한 정으로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라고만 느껴질 뿐이다)


어릴 때도 잘 모르는 어른들(친인척과 이웃, 심지어는 낯선 사람까지 모두를 모두 포함하여)이 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싫었다. 나이는 몇 살이니, 꿈이 뭐니, 공부는 잘하니 등 입이라도 맞춘 것 마냥 일관되고 틀에 박힌 질문들에 대답하기 싫거나 곤란하여 몸을 배배 꼬았다. 나이를 먹었다고 무례하게만 느껴지는 질문들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는 어디 갈 거니, 취업은 잘 되어 가니’의 순서가 끝나자,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만나는 사람은 있니, (결혼을 했다면) 애는 언제 낳을 거니’의 차례가 돌아온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관심 끊으라는 의미를 담아 웃는 얼굴로 공손하게 말하면, 눈치가 빠른 어른들은 웃는 낯을 유지하며 이내 자리를 뜨거나 관심의 대상을 바꾸지만, 눈치 없는 어른들은 포기조차 모른다. 내 앞날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 해주면서 그런 관심을 보인다면 감사히 받아들이겠지만, 호기심에서 출발한, 선을 넘는 무례한 관심은 사양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이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이기적’이라며 혀를 끌끌 차겠지만,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우며, 그 비위를 맞춰주고 싶은 생각도 없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내비치는 나에게, 남을 위해 살면 그것이 다 본인에게 복이 되어 돌아오더라, 던 부모님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서로에게 피해 주지 않고 선을 지키며 사는 쪽이 더 편하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성향들이 사회적 고립은 만드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이것 또한 변화하는 사회의 한 측면이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변해가는 사회적 특성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본인도 피해를 입지 않겠다는 개인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다고 해서 대인관계를 유지하지 않거나, 사회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거나, 차별당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다만, 1인 가구의 증가에 따라 사회적 고립의 수 또한 증가하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옆집에 살던 죽은 남자는 사회적 고립의 대표적인 예다. 가족이나 친구들, 이웃이나 지인들과 멀어져 홀로 집에서만 생활하다, 포르노 잡지에 깔려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유령의 모습으로나마 복도에서 진아를 마주하고, 인사나 대답을 요구하는 모습은 살아생전 고독하고 외로워 누군가와의 관계를 원했지만 용기 내지 못했던 남자의 성격을 암시한다.


집순이, 집돌이, 히키코모리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들, 밖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고립을 겪을 확률이 높다. 취향이나 성향의 차이를 떠나서 관계의 단절이 생기는 순간 사회적 고립이 발생한다.



옆집 남자와는 달리, 주인공 진아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한다.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거리를 두며,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이러한 고립이 주는 외로움과 고독함을 통해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다. 다가오려는 아버지와 수진을 밀어내며, 이어폰을 끼고 바깥소리들을 차단함으로써 혼자라는 테두리 안에 갇히길 자처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아는 안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굉장히 불안정하다. 항상 주위를 경계하고, 티비를 켜놓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며, 같은 옷만을 입고, 넓은 집을 다 쓰지 못하고 방 하나만을 쓴다. 자신을 가꾸거나 관리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 하나 없이 현실에 안주함에 안도할 뿐이다. 행복이나 희망 등의 긍정적인 단어와는 전혀 관련 없이 그저 반복되는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콜센터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모습에서 ‘무감정’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한 그녀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독거사]


사회적 고립이 문제가 되는 요인에는 독거사, 우울증 등의 정신 질환, 폭력이나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혼자 사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독거사다. 1인 가구와 사회적 고립이 증가하는 만큼 독거사 또한 더불어 증가한다. 외롭고 딱한 마음이 드는 것 외에 독거사가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상 연령층의 변화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때문이다.


독거노인들을 위한 복지 제도나 서비스는 잘 마련되어 있어, 독거사 예방이 가능하거나, 발생했더라도 발견이 빠른 편이다. 문제는 2,30대의 독거사다. 나이가 젊고, 핸드폰 등의 전자 기기를 잘 다루며, 각종 SNS를 통해 소식을 알 수 있다는 이유로, 취약계층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의 고독사를 예방하기 위한 제도나 서비스는 없다.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이 문제를 눈여겨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점점 더 방치되어만 간다.


포르노 잡지에 깔려 고독하게 죽은, 발견도 늦어진 옆집 남자가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죽어서까지도 고독하다.



고립사는 독거사와 비존엄사로 분류되는 자살, 무연사(시신을 인수할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죽음)를 모두 포함한다.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에서는 젊은이들의 자살과 관련된 독거사 이야기가 꽤 등장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발견된 시체의 냄새나 형태가 코 끝과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단순히 자살이 증가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독거하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큰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영화 ‘굿’ 바이’에서 주인공이 처음으로 고독사한 시신과 마주하는 장면 또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전철을 밟듯 고령화를 따라가더니, 1인 가구와 고독사의 증가 등 사회적인 모습 또한 따라가는 것만 같다.


이상한 질문을 하며 말을 걸고, 인사 좀 해주지 푸념하며 투정 부리던 옆집 남자의 이상한 행동이, 방치되어 있던 순간까지 고독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의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것이었다.



[현실 반영]


‘현실적’인 것처럼 다가오는 이 영화는 현실 반영을 얼마큼 잘한 걸까, 생각해 본다. GV에서 나왔던 질문들에 대한 홍성은 감독의 대답들을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크게 와닿는 것도, 그리 와닿지 않는 것도 있다.



콜센터 직원.


진아는 현실 속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화 상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무표정함을 유지하되, 하이톤의 목소리로 인사와 응대를 하는 진아의 모습은 공승연 배우의 이미지와 오묘하게 잘 어울렸고, 유튜브를 보며 공부했다는 공승연 배우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소위 ‘진상’이라 불리는 고객들의 예도 좋았고, 그들을 대하는 진아의 담담하지만 무미건조한 태도와 어투가 참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혼자가 편한 진아와는 달리 뭐든 함께하고자 하는 수진 또한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성격의 캐릭터였다. 진아의 입장도, 수진의 입장도 모두 이해되기에 맞지 않는 둘의 관계가 더 안타까웠다.




복도식 아파트. 


진아의 고립된 성격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집에 녹아 있다. 다른 공간을 쓰지 않고 모든 짐들을 방 하나에 넣어 협소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진아의 모습은 고립되고자 하는 의도가 그대로 담겨 있다.


감독은 이를 보여주기 위해 진아의 집이 원룸이 아닌 아파트여야 했으며, 현실을 반영하여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를 선택했다고 했다. 더불어 ‘복도’라는 공간이 만남의 장소가 될 뿐만 아니라, 복도를 통해 옆집을 곁눈질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 등의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지역이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수도권이라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사실 콜센터 직원의 월급으로는 아무리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여도 무리가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최근 들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경향이 없지 않지만(그렇게 따지면 최근 서울에 있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들은 재개발 대상이 되고 있는데 값이 오르면 올랐지, 절대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또한 콜센터 직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엄마의 재산도 물려받지 않겠다며 유산 포기 각서까지 쓴, 그리 안정적이지 않아 보이는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젊은 여자가 홀로 아파트를 전세든 월세든 매매든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엄마가 죽기 전에 도움을 줬다거나, 대출을 했다거나 다른 가능성도 있다지만, 다른 공간을 쓰지도 않으면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진아의 모습은 영화적 허용으로만 가능하며, 낭비나 쓸데없는 고집으로만 느껴질 뿐, 현실 반영을 인정할 만큼 쉬이 납득되지는 않았다.



아버지.


바람나 도망갔던 아버지도 아버지라고 이제 와서 가족 행세를 한다. 돌아가신 엄마는 그 남자를 왜 다시 받아주었는지 모르겠고, 그 남자는 엄마의 자리(집과 핸드폰)를 꿰차고 앉은 것도 모자라 진아에게 유산까지 포기하길 요구한다. 엄마의 임종을 지킨 것이 그 남자인데, 사실은 엄마를 죽인 것이 그 남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깊은 곳에서 뭉게뭉게 솟아오른다.


생물학적으로 아버지면 끝까지 아버지인가, 본인의 책임 소재를 다 하지 않은 채 버려둘 땐 언제고 본인이 늙고 힘이 없어지니 알아서 큰 자식을 찾아와 애비 대접을 받으려 하는가, 가식으로 가득 찬 종교의식들을 행하면서 그 와중에 러브샷을 서슴지 않는 천박한 모습은 아내의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일말의 양심조차 남아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인가.


어딘가에, 사실은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무책임하고도 뻔뻔한 부모의 모습인 것 같아 내 부모가 아님에도 원망이 스쳤다.


마지막에 용서를 하듯 ‘엄마’라는 단어를 지우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채워 넣는 진아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부모니까’라는 말은 언제나 여전히 공감하기 어렵다.




[독립영화]


이 영화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담고 있으며,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나쁘지 않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좋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진부함’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식상하다. ‘한국 독립영화’라고 하면 딱 떠올릴 만큼의 고요하고 침울한, 전형적인 그 분위기를 가진다. 수많은 한국 독립영화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나에게 느껴지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한계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독립영화들은 폭력, 범죄, 살인, 가난, 우울 등의 사회 문제들만을 다루는 장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런 주제를 다루면서도 좋은 영화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많은 영화들이 틀에 박힌 이미지나 분위기만을 좇는 것이 못내 아쉽다.


최근 연달아 개봉한 작품들 ‘정말 먼 곳’, ‘아무도 없는 곳’ 등의 독립영화들 또한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이유 또한 뻔한 분위기를 가졌을 것만 같아서다.


가뭄에 콩 나듯 발견하는 재치 있고 독특한 영화들, ‘족구왕’, ‘소공녀’, ‘메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 등의 영화들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과 행복감을 또 느끼고 싶다.




덧, 담배 피우는 장면이 과도하게 등장한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일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가, 담배만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딱히 담배 피운다고 더 고독해 보이거나 쓸쓸해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냥 더 불편함만 증가할 뿐인데.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sophia__movies


Sophia의 영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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