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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Feb 08. 2021

폭력이 남긴 짙은 상흔.

영화 「세자매」



여자아이 둘이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뛰어간다. 내복과 맨발로 칼바람을 가르며 무언가에 쫓기듯 추운 거리를 달려간다. 이 아이들은 어딜 향해 급하게 뛰어가는 것일까? 분명 제목에서는 자매가 셋이라고 했건만, 한 아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흑백의 흔들리는 화면과 아이들의 거친 숨소리는 앞으로 꺼내들 이야기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폭력]

폭력은 신체적, 정신적 폭력이 있다.

신체적 폭력은 정신적 폭력을 낳고, 정신적 폭력은 신체적 폭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결국 이 둘은 같은 것과 다름없다. 폭력에는 가정 폭력, 성폭력, 학교 폭력, 사이버 폭력, 데이트 폭력 등 수많은 종류의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아동에 대한 폭력 즉, '아동 학대'는 이른 나이에 깊은 상처와 큰 트라우마를 남겨 긴 시간을, 어쩌면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폭력은 대물림된다.

영화 「세자매」는 이 모든 것을 다루며, 피해자들에게는 위로를 전하고, 가해자들에게는 따가운 일침을 가한다.



[희숙]

'미안하다'와 '그지같다', 그리고 '그지 같아서 미안하다'를 입에 달고 사는 희숙은 자존감이 바닥이며, 맨 얼굴에 머리를 댕강 묶고 무채색의 옷을 입는다. 불량의 길로 빠져버린 딸에게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집 나간 남편의 사채 빚을 대신 갚아주면서도 무시를 당한다. 살아갈 의욕이 없고, 자해를 하며, 돈을 빌린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암을 선고받는다.
 
일명 '도를 믿으시냐'로 시작되어 '기가 약하시다'로 이어지고 있는 사이비 종교들에 빠지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빠져들어 사람들을 꾀는 이들에게 짜증과 혐오의 시선을 던졌으며, 새로이 빠져들어 삶을 망가뜨리게 되는 이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이에 희숙은 충분히 변명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지만 내려놓을 수 없는, 자신도 이해하기 버거운 답답한 심정을 어떤 누군가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은,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온전히까지는 아니지만, 이제는 조금 알겠다.
 
평생 감정을 꾹꾹 누르기만 하며 살아온 희숙이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은 딱 두 번 나온다. 딸이 목매는 블러드풉 앞에서 지나가는 말로 자해를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속말과 함께 딸의 앞날을 걱정하며 오열하는 장면 하나. 모든 것이 밝혀지고 터지는 아빠의 생일상에서 잡채를 욱여넣으며 제발 좀 그만하고 먹자며 울지만 그 한 마저 삼켜내는 듯한 장면 둘.


희숙처럼 모든 것을 눌러 담고 삭히다 그 화살 끝을 자신에게 돌리는 삶은 비참하고 그지 같아 싫다. 답답하고 짜증 나고 넌덜머리 난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고 슬프다. 꽃을 만지는 희숙의 삶이 꽃같이 어여뻐졌으면 좋겠다.



[미연]

세 자매 중 가장 부유하며, 겉으로 보기에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 미연. 남편과 아이들, 짠한 언니와 철없는 동생까지 다독이며 모두를 리더십으로 이끄는 미연은 정작 드러나는 이미지를 관리하느라 곪아 터진 자신의 마음까지 보듬기는 버거워 하느님에게 의지한다.

의지처인 제2의 집, 교회에서 남편이 효정과 바람피우는 사실을 목격한 뒤에도 감정을 숨긴 채 표정 관리하는 미연의 모습은, 시련 앞에 무너진 사람보다 더 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모든 감정을 가면 아래 가둔 채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는 모습이,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 더욱 위태롭고 아프다.

그러나 미연은 쓰러지지 않고 이겨내는 인물이다. 남편의 바람 상대인 효정을 남들 모르게 (말 그대로) 짓밟을 줄도 알고, 짐 싸들고 나간 남편에게 강력한 한 방을 날릴 줄도 안다. '왜, 반말하니까 기분 나쁘니' '이혼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발정 난 개새끼야, 애들한테는 전화해라. 하루에 한 번씩'이라는 대사가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이어 몇십 년을 금기시하며 묵혀두었던 상처의 고름을 터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미연이다. 희숙과 진섭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사과하시라며 울부짖는 미연의 모습에서 또 한 번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흡사 '권선징악'의 전형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속 시원한 폭로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어지는 미연의 말이었다. 어릴 때 밤마다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아침이 되면 제발 아빠 빼고 다 죽어 있었으면, 아빠만 빼고 나머지 가족 모두 천국 가서 행복했으면, 매일 밤을 간절하게 빌었다는 그 말. 어릴 적으로 돌아갈 것도 없이 지금의 내가 그런 상황 속에 있었더라면, 분명 그놈 혼자 죽어버렸으면, 제발 그놈이 죽어서 남은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 어린것이 얼마나 큰 고통 속을 헤맸으면 외려 반대의 경우를 생각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냥 모든 것이 끝나길 바랐을까 싶어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중 가장 걱정되지 않는 것이 미연의 앞날이기에 잠시나마 안도를 해본다.



[미옥]

노란 머리를 고수하고 술을 달고 살며, 작가이자 아내이자 새엄마로서 잘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 없는 미옥은 성장하길 멈춘 아이다. 몸은 자라 어른이 되었으나, 마음은 따라 자라지 못했다. 글을 계속 썼다 지웠다 해보지만 완성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어릴 적 기억들은 파편으로 남아 미옥을 괴롭힌다.
 
야채가게를 하는 지금의 남편을 택한 이유가 돈이 아니라 '착해서'였음을 중얼거릴 때, 남편 상준이 의붓아들 성운의 뺨을 때리자 남편을 마구 때리며 '애들은 때리는 게 아니다'라며 다소 과도한 반응을 보였을 때, 엄마가 되고 싶은데 엄마 역할을 어떻게 하는 거냐며 언니가 좀 가르쳐달라며 미연에게 하소연할 때, 성운에게 엄마 노릇을 하고 싶지만 친엄마가 상담받고 있는 교무실에 찾아갈 용기가 없어 술을 마시고 간 탓에 행패를 부리고야 말았을 때.

과하고 지나치다 생각했던 미옥의 모든 행동이 마지막에서야 이해될 때.

옳고 그름이 정확하고, 차별하지 않고, 편견이나 색안경 없이 세상을 대하는 어린아이 같은 미옥이 상처를 치유하고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해자]

가족이 가해자라면 피해자는 신고조차 하기 어렵다. 그 관계가 도장만 찍으면 남남이 될 수 있는 부부관계가 아니라, 피로 이어진 탓에 쉽게 끊어지지 않는 질긴 부모 자식 간의 연이라면 불가능에 가깝다.

극 중 슈퍼에서 술 마시던 아저씨들의 태도와 말, '신고? 신고하면 느그 아부지 경찰서 끌려가고 빨간 줄 그어지고 그럼 느그들은 거리에 나앉는다 이 말이야, 쪼끄만 게 확 그냥 감사한 줄도 모른다' '그 시대는 다 그랬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말들은 다음 세대에게 전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폭력이다. 부모니까, 부모라서, 나를 낳고 키워주는 사람이니까 무조건 덮어 쉬쉬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발상은 구토가 나올 만큼 혐오스럽다. '가족이라서' '가족이니까' 피해자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 말 그대로 가'족'같다.

'미안하다, 속죄한다, 반성한다'라는 말 한마디가 어려워 유리창에 머리를 찧는 미친놈을 보고 있자니, 세상은 불공평한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에게 지워지는 죄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기만 하고, 피해자에게 지워지는 고통의 무게는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키자고 자신이 상처 내어 피 흘리는 자식들을 감싸 안아주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험한 말 가득).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알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모르는 것이 아빠랍시고 생일상을 받아먹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가득 차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쌍욕을 참느라 움찔했다.

천국 따윈 바라지도 않으니, 지옥은 제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꿈틀거린다. 인두겁을 쓴 악마들이 갖가지 이유들로 인간 대접 거하게 받고 살았으면, 죽어서는 끝나지 않는 지옥 속에 고통받길 바란다. 내 죄의 무게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옥이 두렵기만 하지는 않으니 할 수 있는 말이겠다.

'느그 아부지 이제는 안 그런다'라고 말하는 엄마 또한 공범이다. 피해자들에게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미래에도 계속될 악몽은 과거로 묻으라고 묻힐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혹은 알면서도 덮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가해자는 얼마든지 묻을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묻고 싶어도 묻을 수가 없다. 평생 동안 피해자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폭력의 트라우마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폭력은 드러내야 한다.

 
정말 소름 끼치고 무서운 건, 길을 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아직도 이런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정인이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개인적으로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명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에도 있는 일이라는 의문을 가질 일이 아님을, 드러나 있지 않아 쉽게 볼 수 없더라도 가까이에 있음을 알고 있어야 피해자들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가해자들이 처벌받을 수 있다.



[피해자]

희숙, 미연, 미옥 그리고 진섭은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다. 더욱 잔인한 사실은 정작 본인이 가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 혹은 그에 대한 사과를 할 줄 모른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가해자인 아빠 혹은 다른 가해자들과 다를 바 없다.
 
희숙은 아마도 아빠에게서 받은 가정 폭력을 남편에게서 똑같이 받았을 것이다. 남편 앞에서 주눅 들어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없는 돈을 꾸준히 가져다 바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이런 희숙은 딸 보미를 보듬지 못한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남편 정범에게 있겠지만, 침묵으로서 모든 폭력을 삼켜버린 희숙은 보미에게는 또 다른 가해자다.

미연은 종교적으로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다. 모태신앙으로서 아이들 마음에 종교가 자리 잡았으면,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우리 아이들은 당연히 이 종교를 따랐으면 하는 생각들은 미연의, 그리고 종교를 강요하는 모든 부모들의 그릇된 생각이다. 강요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낸다. 어려서 받는 영향까지는 어찌할 수 없지만,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 기반되어야 하는 영적인 영역이다. 적정 선을 지키지 않으며 모든 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 정당화하려는 부모들의 강요는 엄연한 폭력임을 알아야 한다.

미옥은 방임으로서 남편과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다. 그녀의 이기적임과 귀차니즘, 알코올리즘을 모두 받아들이며 오히려 애지중지 해주는 남편과 서로 신경 쓰지 않음으로써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은 겉보기에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가족원 간에 이해로서 합의된다면 적어도 폭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로 하지 않고 인내한다고 폭력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아들 성운은 미옥을 남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내적으로는 상처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고, 남편 상준은 남들 몰래 상처의 고름을 삭혀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희숙처럼.

진섭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치료받지 않으며, 망가 친 채 부모 곁에서 떠나지 않음으로써 죄책감을 심어주는 가해자다. 가해자에게 가해를 돌려주는 것이 어쩌면 복수일지 모르나, 결국은 자기 자신과 부모 형제 모두를 좀 먹는 일에 그칠 뿐이며, 폭력의 한 부분이 될 뿐이다.
 
주어진 역할들, 가족의 일원, 딸, 누나, 손주, 애인, 친구, 직장 동료, 친척, 지인의 역할을 해나가며,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의 피해자였으며, 누군가에게의 가해자였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사과를 건넨다. 의도하지 않았건만, 나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 받은 이가 있다면 용서해주기를. 덧붙여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보리라 다짐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종교]

처음부터 알았다. 특정 종교를 예로 들었지만, 결국은 모든 종교의 이중적인 모습과 가식을 꼬집고 있음을 말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보편화시켜 모든 종교인을 비판함은 결단코 아니다.)

인생이 기독교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미연의 모습을 보며, 무엇이 미연을 종교 속으로 밀어 넣었는지 궁금했다. 교회에 헌신하기 위해 일해서 돈을 벌고 살아가는 것만 같은 모습은 정상적인 삶이라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라 여겨졌다.

목사에게 안절부절못하는 아빠의 등장에 모든 것이 이해되는 동시에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종교를 맹신해왔을 아빠의 모습이 독실한 미연의 모습과 겹쳐져 소름 끼쳤다. 자신이 지은 죄를 제대로 알긴 하는지,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죄를 씻어내고자 하는 역겨운 행동에 돌을 던지고 싶었다. 영화 「밀양」의 이신애가 말한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 피해자 본인이 하지 않은 용서를 하느님에게서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철면피의 아빠가 믿는 기독교에 열렬한 미연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반항심과 저항심에 오히려 기독교를 욕하며 비종교인이 될 줄로만 알았다. 아빠와는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수천번 수만 번 다짐했을 테니까. 그러나 기댈 곳 없는 마음은 결국 익숙한 종교에 가 앉았나 보다.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게 되었을 미연의 심정을 헤아리다 씁쓸함만 남았다.

독실한 종교인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종교에서 받는 가르침 그대로 실천하며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행동하고 다녔으면 좋겠다. 더 이상 비종교인이 종교인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각자의 선택과 믿음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연출]

이승원 감독의 영화는 처음인데, 섬세한 연출과 설정들 덕에 감독이 여자인 줄만 알았다 (검색 후 영화 「팡파레」에서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 그 사람).



빛과 색.

과거의 어두운 기억은 흑백이다. 현재의 암울한 상황은 색이 없다. 불안함과 분노는 붉은빛이다.

희숙의 꽃집은 생기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둡다. 초록의 잎들은 빛을 잃어 회색이고, 가게에는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어두운 꽃집에서 붉은 난로만 빛과 열을 내며, 오랜만에 들어온 주문의 꽃바구니 속 꽃은 붉은색이다. 희숙의 집 또한 빛이 없다. 유일한 빛은 TV 뿐이며, 모든 소리를 덮어버리는 지하철 소음이 그 어둠을 짙게 만든다.

미옥 역시 어두운 공간 안에 있다. 잡동사니 가득한 정리되지 않은 방은 빛을 더욱 차단하는 것 같다. 유일한 빛은 TV나 노트북, 간혹 밖에서 비추는 가로등뿐이며, 색이라고는 노란 머리와 주황색 점퍼와 초록 소주병뿐이다.

비교적 밝은 곳에 있는 미연의 주 무대는 집과 교회다. 옷과 공간 모두 흰색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든다. 결국 밝음이라는 포장은 갈가리 찢기고, 꽁꽁 숨겨두었던 어둠이 머리를 내민다. 기도 수련회의 붉은빛 십자가 아래 효정을 단죄하는 미연의 모습은 후련함과 공포감을 동시에 자아낸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누군가의 앞에서도 속 시원하게 울 수 없는 미연이 회색빛 침구에 얼굴을 묻고 소리 지르는 모습은 아프기만 하다.



세 자매, 그리고 막내아들.

희숙, 미연, 미옥, 그리고 진섭. 미연과 미옥은 정당한 관계의 자식이라 맞지 않고 자라며, 이름 또한 자매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첫째 희숙과 막내 진섭은 혼외 자식이라 학대를 당하고 이름 또한 닮지 않았다. 신체적 학대를 당하지 않은 미연과 미옥의 자존감 자체는 훼손되지 않은 편이나, 신체적 학대를 당한 희숙과 진섭의 자존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기만 하다. 그러나 네 명 모두 학대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이 진섭의 존재를 지운 '세 자매'인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막내아들의 존재가 언급되었을 때는 영화 「이장」에서처럼 남아 선호 사상의 잔재로 인해 세 자매가 차별 대우를 받는 이야기로 풀리겠거니 지레짐작했다. 그 후 계속해서 '진섭이는 괜찮다'라는 말을 하는 인물들을 보며 진섭이 괜찮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학대의 상처가 가장 큰 인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반전. 이것은 감독이 치는 뒤통수다. '세자매'라는 단어 하나로 그의 존재를 꽁꽁 숨겨 놓고, 서서히 물밑 작업을 하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펑'하고 터뜨리는 폭탄인 것이다. 그 등장마저 예사롭지 않으니 관객을 경악시키는 완벽한 성공이다. 감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카메라와 앵글이 이 영화의 정수다.

올해 한국영화 중 「소리도 없이」에 이어 「세자매」가 나와주어 기쁠 따름이다.



[배우]

이 영화를 논하면서 배우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선영 배우의 초점 없거나 흔들리는 눈동자, 푸석한 얼굴에 자신감 없는 표정, 주눅 든 자세와 둘 곳을 잃은 손. 블러드풉의 앞에서 내 딸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며 우는 장면도 기억에 남지만, 집을 나가겠다며 난폭해진 딸의 소매를 소심하게 잡으며, 암이라고, 조금 무섭다고 말하는 장면은 가슴을 후벼 판다. 희숙도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당연히 무섭고 두려운 일인 것일진대, 세상에 미련이 없을 줄만 알았다고,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보였다고 너무 쉽게 오판하고 말았다. 그 심정을 묵묵하게 표현하는 김선영 배우의 어조와 민망한 듯 쑥스러워 보이지만 큰 용기를 낸 것임을 알려주는 복잡한 표정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문소리 배우의 눈빛과 표정, 지휘하는 손 끝과 인내하는 목소리. 스쳐 지나가는 모든 순간의 살아 있는 표정과 눈빛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한국에 몇 없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문소리 배우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인상 깊지만, 앞서 언급한 남편에게 선전포고 하는 장면과 효정에게 단죄하는 장면, 그리고 클라이맥스의 포문을 여는 생일잔치 장면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목소리는 떨리지만 격앙된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평생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 말들을 쏟아내는 미연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누군가에게 가해자였을 사람들보다, 그 형태나 종류와 무관하게 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놓여있던 피해자들의 마음은 차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공감, 속이 시원했을 대리 만족, 아픈 상처가 떠오르는 고통, 끝까지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이기적인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 가족이라는 이름의 절망까지.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태풍이 한바탕 지나간 후에 찾아든 고요는, 희망을 전한다. 그 모든 것을 문소리라는 배우가 이끈다.

(개인적으로 마트에서 미옥과 통화하는 장면 또한 매우 인상 깊다.)



본래는 모델인 장윤주는 영화 「베테랑」에서 미스봉 역할을 맡으며 기대 밖의 연기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더니, 이번에는 술에 취해 혀가 꼬이며 비틀거리다가도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하며 감정을 표현해내며 코미디와 정극을 넘나 드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이제 장윤주 배우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앞으로의 연기가 더 기대되는 한편, 철없거나 코믹한 캐릭터로 한정되는 역할만 맡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염려도 더해진다.
(계속해서 먹어야 하던데... 식단 관리 하기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멸종할 때까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희망은 언제든 있다고 믿으며 부정적인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려 고개를 힘껏 내저어 본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세 자매가 한 컷에 많이 담기길 바라본다.



+ 영화가 어둡고 과하게 느껴지며 공감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어떠한 폭력에 덜 노출된 채 살아왔다는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행운이다.


+ 슈퍼에서 열 살짜리 미연을 쓰다듬으며 언제 이렇게 예쁘게 컸냐는 술 취한 아저씨의 성희롱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 장면이 무탈히 지나가고나서야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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