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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하리 Jul 26. 2020

엄마 나한테 사과해

도대체 그동안 나한테 왜 그랬어

tvN  디어 마이 프렌즈 (2016)

요즘 넷플릭스에 빠졌다. 특히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에 빠져 산다. 황혼의 삶을 살아가는 노인들을 다룬 드라마인데, 매 에피소드마다 마음을 울리는 대사들이 줄을 잇는다. 소위 말하는 띵작 of 띵작. 그중에서도 시간이 지나도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극 중 딸 박완(고현정)이 자신의 엄마인 장난희(고두심)에게 30년 동안 묵혀 두었던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이다.


'여섯 살에 할머니 집 앞 들판에서 나한테 약(농약) 먹였을 때, 나 분명히 알았거든. 나는 엄마 거구나. 그러니까 무서워도 엄마가 먹으라고 하면 먹어야 하는구나. (…) 나한테 잘못했다고 그래. 나한테 왜 그랬어.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가 죽여도 돼?'


누구나 똑같겠지만 극 중 박완처럼 엄마에게 묵혀 둔 이야기를 꺼내는 건 쉽지 않다. 내 속이 곯으면 곯았지. 이미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엄마에게 또 다른 짐을 안겨줄 수는 없기에.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말 그대로 '살려고' 엄마에게 모든 이야기를 토해낸 적이 있다. 지금 그 경험을 말하고자 한다.




중학교 3학년, 엄마가 많이 아팠다. 동네 병원부터 대학 병원까지 수십 곳의 병원을 다니며 검사란 검사는 모두 받았다. 하지만 항상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고 이 세상의 어떤 의사도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병의 원인은 지독한 외로움이었기 때문에. 사정상 집에 머물 수 없었고 친척집과 병원을 전전하며 떠돌았다. 아빠는 돈을 벌어야 했고 오빠는 입시생이었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갑자기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가면 학교에 있든, 도서관에 있든, 친구들과 있든 달려갔다. 방학기간에는 장기입원을 한 엄마와 병원에서 살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엄마의 병세가 차츰 나아졌다. 아빠의 사업도 차츰 안정세를 찾아갔고 오빠도 원하던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1년이 지나고 집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16살, 나에게는 강박증이 찾아왔다. 함께 잠을 자던 엄마가 내 얼굴을 보고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도, 날 알아보지 못한 채 욕을 했을 때도 난 혼자였다. 무섭고 두려웠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나마저 도망가면 엄마는 정말 혼자니까. 상황이 나아진 후에도 엄마가 또 아플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옥죄었다. 불안감은 강박증으로 이어졌고, 한두 번의 확인이 수십 번이 되었고 수백 번이 되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가족의 행복을 깨뜨릴 수 없었기에.


고등학교 1학년, 아빠가 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을 잘 끝났지만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아빠는 암수술을 받은 이후 어느 부위에 전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살았다. 아빠의 불안감은 우울증이 되었고 상태가 악화되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폭력을 일삼았고, 오빠가 군대에 간 상황에서 그런 아빠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등교 준비를 하던 중 아빠에게 맞았던 적이 있다. 갑자기 달려온 아빠에게 나는 무방비한 상태로 온 몸을 맞았고 아빠는 분을 못 이기겠는지 집 밖을 나갔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침대에 교복을 던지며 학교에 가라고 말한 후 돌아섰다. 그뿐이었다. 다음 날 내가 아빠한테 맞았던 일은 우리 집에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유일히 할 수 있는 반항은 아빠와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빠와 대화가 단절되니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고, 나는 더더욱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를 못 참은 엄마는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엄마의 말. '너 아빠한테 사과 안 해.'


오빠의 제대 후 나아질 거라 희망했던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맞벌이였던 부모님 아래 집안일은 오빠와 나의 몫이었는데 대부분의 집안일을 나 혼자 맡아서 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나는 집안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퇴근 후 엄마는 쌓아져 있는 집안일을 보며 나에게 화를 냈다. 왜 여태껏 집안일을 하지 않았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왜 오빠와 나 둘 다 똑같은 자식인데, 나에게만 이런 말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며 반박했다. 갑자기 방 안에 있던 오빠가 달려와 내 머리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리곤 분이 안 풀리는지 바닥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나는 맞으며 소리를 질렀고 오빠는 내 방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난 베개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잘못됐다 느끼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 순간 엄마와 오빠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 말. '쟤는 정신병자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 '


그렇게 성인이 됐다. 웬만해서는 집에 오래 있지 않았고 밖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족과는 소통을 하긴 했지만 그리 깊지 않은, 딱 그 정도 거리만 유지했다. 이십 대 중반이 되자 엄마가 나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바랐다. 오빠와 날 가르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왔던 과거와는 달리 경제적인 여유가 뒷받침된 지금 와서야 엄마는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내 감정도 추스르지 않은 상황에 엄마에게 살갑게 대할 수 없었다. 다가오는 엄마를 밀쳐내기 바빴고 엄마에게 못된 말을 쏟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내 속을 모르는 엄마는 그런 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날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건 난 여전히 엄마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엄마에게 못된 말을 내뱉은 날이면 하루 동안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10년 동안 쌓인 감정은 손쓸 틈도 없이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 상처 주고 후회하고 또 상처 주고,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 이야기를 꼭 꺼내야 했다. 그래. 얘기해보자. 관계가 정말 틀어지기 전에 말이라도 해보자.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바에 고치려는 시도라도 하자. 후회 없이.


하지만 맨 정신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술을 먹었다.  그리곤 늦은 밤 집에 귀가해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잠깐 침대에 앉아봐. 나 할 얘기가 있어. 엄마. 엄마는 술을 먹고 온 나에게 뭐라고 하려다 내 표정을 보고는 조용히 침대에 앉았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엄마를 똑바로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이제 안 참으려고. 내가 왜 집에 있기 싫어하는지 그리고 왜 틈만 나면 이유 없이 화만 냈는지 그 이유를 알려줄게. 나 엄마가 아팠던 후로 강박증이 생겼어. 어릴 때 학교에 자주 지각했던 이유도 다 강박증이었어. 일찍 일어나도 집에 아무도 없으면 가스밸브, 보일러, 현관문 확인을 계속했거든. 확인을 안 하면 엄마가 다시 아플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울면서 확인했어. 나도 하기 싫은데, 빨리 학교 가서 수업 들어야 하는데 어쩔 수가 없더라. 난 엄마가 아픈 게 죽을 만큼 싫었거든.


오빠가 9년 동안 쓰던 노트북 나 주고 새 노트북 샀을 때, 나 불만 한 번 안 가졌잖아. PPT 파일 여는데 3분이 걸리는 그 고물 같은 노트북으로 전액 장학금, 공모전 수상 모든 거 다 해냈잖아. 근데 왜 칭찬 한 번을 안 해줬어. 오빠는 항상 최신 기기만 쓰고 나는 낡아빠진 것만 써도 불만 한 번 안 가졌잖아. 난 내가 자식이었으면 정말 예뻤을 것 같은데, 엄마는 안 그런가봐.


엄마, 는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 지나가는 남자들이 갑자기 손을 들면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려. 맞을까봐. 그리고 쉽게 화를 내는 남자랑은 말도  섞어. 무서워서.  계속 이렇게 살아왔어. 어렸을  아무도  편이 아니었잖아.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 어린 여자애였을 뿐인데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았잖아.  상처 지금도 온전히  안고 살고 있어. 근데   살고 있잖아. 이렇게 훌륭하게 커서  몫해내고 있잖아.  정말  기특해? 나는 엄마 자식 아니야?  근데 엄마가 너무 미운데, 엄마를 너무 사랑해.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예뻐해 주면  ? 나도 엄마 자식이잖아.  나이 들어서까지 엄마 미워하고 싶지 않아.  지금부터라도 사랑해줘 엄마. 제발.  


눈물이 흘러 눈 앞이 흐려진다는 말. 그저 노랫가사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처음 경험했다.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엄마의 형체만 보이는 상황에서 여태 내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쏟아냈다. 속이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은 후 '너도 잘못했잖아'라고 대답할 엄마의 모습이라면 우리의 모녀지간은 정말 끝날 것 같아서.


그러나 엄마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며 같이 울었다. 어떤 이야기에는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는 땅만 쳐다보기도 하며 함께 울어줬다. 그때 당시에 정확히 엄마가 나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정확히 기억하는 건, 이야기를 끝낸 후 엄마가 나를 안아줬다는 것.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를 정도로 너무 행복했다는 사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팅팅 부은 눈을 감싸며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어떻게 엄마를 대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엄마가 요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방을 나갈 수가 없었고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렸고 엄마는 누워있는 날 보며 말했다.


'하리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해놨어. 우리 이거 먹고 노트북 사러 가자.'




그 일이 있던 후 엄마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50년 평생을 살며 몸에 배인 습관들을 나를 위해 바꿨다. 어느 순간부터 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과일들로 가득 차있었고 방문을 열 때마다 서프라이즈 선물들이 방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과거의 엄마의 성격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표현을 전혀 하지 않던 엄마가 이제는 나를 꼬옥 껴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사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나에게 일부로 상처를 준 건 아니라는 걸. 엄마도 엄마가 처음인지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건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이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회피'라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엄마가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엄마가 강할 수는 없기에.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잘못된 것은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엄마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난 그 행동에서 엄마를 용서하고 있다. 아니 이미 용서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난 바뀐 엄마의 태도에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걸. 단지 표현하는 방식이 남들과 달랐을 뿐이었다. 이미 그 사실 하나로 나는 엄마를 용서했다.


엄마 고마워. 우리 그냥 이렇게 편하게 살자. 잘못한 일이 생기면 서로 사과하고 용서하며 그렇게 살아가자. 친구 같은 엄마, 친구 같은 딸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자.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참 다행이야.


엄마와 처음으로 버스 타고 데이트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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