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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실섹시 Jun 09. 2024

30대의 삶 - 16

요즘 내 독서 취향과 방식 그리고 삶


최근 몇 년간의 나는 비문학류의 책들을 병렬형 독서로 소비하고 있었다.


병렬독서의 이유를 설명하자면 일단 책을 들고 다니게 너무 귀찮아서다. 그리고 까먹고 안 가져오면 몹시 화가 나는데 병렬독서를 하면 책을 안 읽을 수 있는 명분에서 피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이들 추천하는 e-book은 책을 읽다가 삼천포로 빠지기가 너무 쉽다.

휴대폰을 5분만 안 봐도 푸시알람이 화면 빼곡히 채워지는 요즘 같은 때에 휴대폰으로 책을 읽는다? 적어도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e-book은 도저히 독서를 하는 기분이 나지가 않아..


비문학을 채택한 이유는 효율적이라서.

비문학은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결론에 도달한다. 보통 책 제목만 봐도 얼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예상이 되긴 하지만, 그 안에는 좀 더 세분화된 콘텍스트를 통해 작가의 주장이 더 견고해진다.

좋은 메시지가 많고, 보통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간과하기 쉬워 잠시 잊고 지내던 삶의 태도를 빠르고 명료하게 일깨워준다. 그래서 집중의 호흡이 짧아도 부담되지 않으며, 하루하루 읽었던 내용의 메시지를 기억하며 살아보면 매일 조금씩 작은 성취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고전 문학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소설이 재밌기 때문이고, 그중에서도 고전문학인 이유는 검증됐기 때문이다.


나는 썰 듣기를 좋아한다. 소설은 어지간한 썰 풀기의 대가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데 내가 들어봄직한 제목의 소설이라면? 게다가 그것이 고전문학이라면? 대단한 평판이 입증되었으니 이 흥미로운 썰의 완성도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아 물론 명작이라고 다 내 취향에 맞지는 않지.


그리고 기분 탓이겠지만 소설을 완독 했을 때 오는 통쾌함이 있다. 왜냐하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호흡의 집중, 몰입이 필요하다. 특히 고전문학은 각 잡고 독서를 위한 시간을 몇 회에 걸쳐 확보하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완독 하기 꽤 까다롭다. 흥미로운 전개까지 도달하는 시간도 그렇고, 요즘같이 집중력을 빼앗기기 좋은 콘텐츠 과잉의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완독을 해냈을 때, 작가의 시나리오를 모두 이해하고 그 안에 복합적인 메시지를 해석까지 해냈을 때 마주하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기분 탓이 가장 큰데 나는 소설을 읽었을 때 비로소 독서를 한 기분이 들고, 그중에 고전문학을 읽었을 때는 지적 허영심까지 채워지는 기분이라 더 좋다 하하.


책은 지극히 취향의 영역이지만 문학 비문학 모두 장점이 있는데 정리하자면 비문학은 명료한 텍스트의 집약체로 효율적인 정보전달로 통쾌함을 준다면, 문학작품은 집중을 도모하기 수고스러운 요즘 같은 때에 긴 호흡으로 사람을 몰입시키는 비밀스러운 힘이 있는데 그 섬세한 힘을 붙잡고 완독해냈을 때의 통쾌함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사실 병렬형 독서나 비문학 같은 류들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나는 한 번에 하나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경험상 내가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할 일은 많은데 초조한 마음에 그 무엇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스스로를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만, 병렬형 독서가 좋은 이유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최적화한다는 면에서 좋은 점이 있다. 단점으로는 책 이름과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요즘의 내 병렬형 독서 방식에는 비문학류 서적만 소비한다.

요즘의 비문학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내용들이 많아 메시지가 겹치는 편이다. 그래서 동시에 읽어도 크게 이질적이지 않다. 그리고 아주 간결한 구성으로 짧은 호흡의 챕터별 메시지가 명료하니 한 챕터만 읽어도 한 권을 읽은듯한 기분을 준다.

 따라서 한 권의 개념보다 한 챕터별로 다른 책을 읽는 기분으로 소비하면 병렬형 독서도 썩 나쁘지 않다. 다만, 비문학 서적도 작가가 챕터별 구성을 통해 기승전결의 큰 그림을 그려놓았을 텐데 나 같은 방식으로는 그 큰 그림을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언제나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는 식의 결론 위주적인 태도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대답으로 변해버렸다.
말할 것도 없이 실패를 거듭하며 내가 읽어 내린 책들의 밑줄은 그때의 내가 그은 과 상당 부분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어떤 칼럼에서 읽은 내용이다. 취향과 고집에 따라 포류 하던 삶의 방식에서 새로운 것과 새로운 방식을 선입견 없이 소비하고 그것의 장단점을 취합하며 삶의 방향을 다시금 잡아가는 일.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쓴 '삶의 부조리함' 그리고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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