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성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지난주에 좋은 기회로 모델 촬영을 하게 되었다.
마라톤 행사에서 송출될 영상 촬영인데 워밍업 동작에 마라톤 취지를 적절히 섞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일이었다. 초반 기획 단계에서 여러 가지를 논의하는 중에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하게 되었는데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되어 의견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영상촬영 당일에 촬영 감독님과 담당 PM 분과 담배를 피우며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이 전의 커리어에 대해 얘기하니, '어쩐지 운동만 하신 분 같지는 않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디어를 발제하는 톤 앤 매너나, 업무 전개 시 업데이트된 상황 공유 등이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고는 묻어 나올 수 없는 기본적인 태도 등을 추켜 세워주셨다.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전공이 없다.
대학을 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늘 내가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여기게 되는 일종의 주홍글자로 작용한다. 헬스 업계에 몸 담은 지는 벌써 8년이 다 되어가고 그동안 알음알음 공부하며 얻게 된 여러 자격들이 있지만, 어째서인지 전공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업계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가진 이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내가 그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곤 한다.
게다가 피트니스 사업의 시장이 커지며 너도나도 몸짱이 된 요즘의 일반인, 그러니까 이 분야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 중 몇몇은 정말 전문가 수준의 지식수준을 자랑하기도 한다. 정보화 시대인만큼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를 습득하기 쉬워진 요즘 전문가라는 타이틀의 무게가 더없이 무거워진 것 같다. 시장이 커지니 이전에는 알기 어려웠던 정보들이 상식이 되고, 너도나도 몸짱이니 본인이 만들어 놓은 몸이 곧 그 사람의 전문성과 비례했던 전에 비해 요즘은 웬만한 몸 수준으로는 전문가라고 인정받기 힘들어졌다. 그뿐이랴. 압도적으로 몸이 좋으면 약쟁이라고 평가절하를 받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서 대개 본인의 경제활동을 하는 전문 분야에 대해서 타인이 아는 척을 할 때 썩 기분이 유쾌하지 않아 팩트로 두들겨 패며 그들의 말을 맺게끔 하지만, 요즘 나는 그냥 말하도록 둔다. 정보화 시대가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달갑기도 한 게, 몸을 만들기 위한 많은 궁금증들이 사실 아주 상식적인 일이라 굳이 풀어서 설명하는 게 상당히 귀찮은 일인데 누군가가 나서서 아는 척을 해주는 것은 나의 일을 덜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발화자가 틀린 정보를 말할 때인데, 나는 이때도 나의 의견을 묻지 않으면 굳이 나서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전문가가 옆에 있는데도 본인이 나서서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이면 대개는 아주 역설적이게도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라 팩트폭행을 달가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전문 분야를 벗어난 많은 부분에서도 늘 공부를 멈추지 않아 왔다. 독서와 글쓰기를 공부로 여기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고졸 타이틀로 나 스스로의 밸류가 평가절하 당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채택한 나만의 루틴 바로 독서와 글쓰기. 그것이 그 흔한 대학 졸업장 없이 사회에서 좀 더 가치 있는 인간으로 평가되며 살아남기 위한 나만의 발악이다. 그 결과 위에 언급한 내용과 같은 도전에도 자존감이 크게 위협받지 않게 되었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보다 더 깊이 있는 대화의 주제에도 여러 어휘를 채택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운동만 하는 사람'의 인식에서 벗어난 평가를 받게 된 것 같다.
사실 이러한 평가에 기분이 좋은 것도 묘하게 여겨진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되어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비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칭찬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비었다, 안 비었다를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지식의 총량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부터 비롯되었을까.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도 영어를 못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마이너스 인격에도 주워들은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지식과 분별력의 혼합이 '지성'인 것으로 생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지성인'의 범주에 속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알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물론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평가절하하는 오만이 될 때 지성은 질병이 된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나는 심심찮게 타인을 얕보는 지성의 간교함을 목격했다. 지성을 이유로 무시당하는 이들의 먹먹함을 봤다. 입 떡 벌어지게 비싼 겉치레의 '신사'에게 "배운 것도 없이 무식하니 이런 일이나 하지"라는 말을 들었고, 본 적도 없는 귀중품을 분실했다며 호통치는 '사모님'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아한 자태로 자리를 뜨는 그 위선자들의 거짓 지성 앞에 굴복한 날에는 사무치는 허탈함에 신음하며 밤을 지새웠다.
거짓 지성과 가시적인 품위에 그렇게 학을 떼고, 지성에 꽃을 피우겠다고 다짐하며 씨름하여 어렵사리 합격한 회사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수에 넘치는 직장에 와서 좋은 점이라고는 지성이 질병이 되어 버린 자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밖에서 부모님의 어깨가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허울을 쓴 이들은 남들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샌님'으로 여겨지는지 모르고, 각자의 이상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 이상의 힘을 쏟는다.
허위허위 밥벌이를 이유로 사회를 전전하며 지성이 풍기는 악취에 나의 후각이 마비된 지 14년째.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포부를 품고 무섭게 돌진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땅으로 꺼지고 싶을 만큼의 공포를 느낀다. 더불어 살고 싶다는 사람은 없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는 사람만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답도 없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지성의 피해자로, 혹은 지성을 빌미로 한 가해자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학원가에는 이른 아침부터 온갖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전철역 계단을 줄 서서 올라가야 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무엇을 위한 분주함이며 누구를 위한 지성인가. 변화를 갈망하는 자기중심의 지성보다 타인을 세워 주며 함께 사는 지성이 넘쳐나는 사회, 그래서 웃음이 마르지 않을 사회를 감히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