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saengwriting Apr 10. 2023

그림을 다시 시작하면서

두 번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


우리 집에는 나 말고 세명의 여자들이 더 살고 있다. 나와 함께 사는 여인들이고, 이들 중 두 명은 앉은키가 120 센티미터나 되고 다른 한 명은 90센티미터가 넘어 다들 나보다 한 덩치들 하지만 얌전히 앉아있기에 집이 비좁진 않다.


작년에는 나무를 주로 그렸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좀 다른 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의 동거녀들이 태어났다. 그때 나에게는 92 x 122 cm의 캔버스 2개가 여분으로 있었는데 떠오른 생각을 넣어보기엔 좀 크다 싶어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고민보다 사러 가기 싫은 귀차니즘으로 일단 6B 연필을 들고 밑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태어난 나의 첫 번째 동거인이다. 처음 그려 넣은 여인의 뒤태라, 선으로 여인의 뒤태를 그리고 큰 여백을 어떻게, 무슨 색으로 처리할까를 잠시 고민했다. 창오지문 모양을 떠올리며 한국미가 조금 표현되면 좋겠다 싶어 창오지문양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애쓰며 골드로 여백을 채워 보았다. 그래서 다 그려진 그림은 나쁘지 않았고 여백을 골드색으로 선택한 것이 정말 잘한 것 같다.


그래서 두 번째 동거인은 첫 번째 여인과 다른 자세로 그렸지만 고민 없이 쓱쓱 그려낼 수 있었다. 첫 번째 캔버스보다 두 배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캔버스여서 옆 모서리까지 선을 연장시켜 그려냈다.


세 번째 동거인은 위의 두 여인들보다는 작은 사이즈인 46x92 cm 캔버스에 그렸다. 이번에는 여인의 몸에 살짝 터치를 더해 깊이를 넣어 보았다. 그리고 창호지문의 문양을 좀 더 살리면 어떨까 싶어 검은 줄을 넣어 시도해 보았고 여백을 메울 색도 골드 말고 다른 색으로 고민도 해 보았지만 그림 자체가 어두워지는 것 같아 처음과 같이 완성시켰다.


나는 그림이 어두워지는 것이 싫다. 내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나의 긍정적이고 밝은 기운이 그림에 그대로 담기기를 바라며 그림을 그린다.


구글에서 찾은 비너스 조각상 사진

아주 오래전 고3 때 비너스 조각상을 처음 그려보면서 사람 몸, 여인의 몸 그리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후 대학교에 들어가서 실제모델을 보며 누드를 자주 그렸었다.


하지만 호주에 살면서 30년 가까이 그림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몇 년 전부터 가끔 누드 사진을 보면서 예전 꽤 잘 그렸던 기억으로 무뎌진 손을 풀어보았다. 하지만 넘 오래 쉬어서 실력은 바닥으로 형편없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역시 그리는 맛은 좋았다.

손풀기 위해 그려본 그림들을 찾아보니 보관 부실로 종이가 찢어지고 상태가 좋지 않다. ㅋㅋ


선 연습용으로 그린 연필 스케치

이렇게 연필로 스케치하면서 굳어버린 손을 가끔씩 풀었고 그러다가 다시 그림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조금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것이 시작한다고 다 완성품이 되지는 않았다. 가끔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중간에 엎어버리고 싶은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정말 신중하게 그리고 싶은 것을 찾아 그렸는데도 가끔 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무척 난감했다. 그래서 애를 쓰며 고쳐보려 하지만 한번 마음이 삐딱선으로 틀어지면 아무리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아 작년에는 혼자 많은 시간 끙끙거렸다.


처음에는 혼자 기분이 가라앉아 허우적 되다가 어느 날 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의 가라앉은 기분이 아들에게도, 나의 건강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중요한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 주제 파악을 하게 되었다. 천재화가도 아니면서, 계속 그림을 그린 전문화가도 아니면서, 이제 막 시작한 주제에 성공작만 그려낼 줄 알았던 방자함이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때까지 들어간 물감과 노력과 시간들이 아까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시작한 뭔가에 대한 실패가, 그림이지만 실패가 두려웠던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시간 반성하며 만들어낸 나만의 주문이 생겼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고 실패가 두려워 움츠린다면 발전도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흰색으로 엎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 엎어버리는 것에 두려움도 미련도 갖지 말자!’


그래서 작년에 나무를 그리면서도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보기도 해서 우리 집 나와 함께하는 동거인들, 여인들을 태어나게 된 것이었다. 지금은 거실 벽, 창틀 등등 여기저기 옮겨 걸어보고 있지만 집안 어디에다 걸어도 분위기가 좋아 보여 혼자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세명의 여인들과 개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자신의 반려견이 젤 똑똑하다 생각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