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 임신했어?’ ‘진짜, 그럴 줄 알았어. 느낌이 그럴 줄 알았다니깐,’ ‘어떡하지? 낳아야 하나?’
남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면서 남편의 기분을 살핀다. 남편이 아이를 가진 것을 좋아하나? 걱정하는 건 아닌가? 결혼 13년 차 내 나이 43살 3월의 이야기이다. 아이를 가진 것이 너무 기쁘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가졌으니 그런데 아이를 또 잃을까 봐서 불안하다. 이번엔 임신을 계획하지 않았다. 나이도 있었고, 더 이상 나에게 임신은 없을 줄 알았으니깐. 아니 임신을 안 하고 싶었다. 또다시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다. 잘 될 것 같은 기분. 나에게 찾아온 소중한 생명. 나의 삶에서 온 마음으로 다한 절실한 기도를 부르게 한다. 하지만 또 심장이 멈추었다. 잊고 싶었던 지난 8년의 시간을 또다시 마주하게 했다.
결혼 2년 차 된 33살 놀만큼 놀았으니 아이 갖자 달달한 둘만의 신혼을 즐겼고 놀만큼 놀았다. 부모님들은 ‘언제 아이는 낳을 거냐’ 고하셨다. 부모님들이 보시기에 33살은 첫아이를 낳기에 너무 늦은 나이이다. 하지만 주위에 아이 있는 친구들도 없었고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자기 일을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내 주변 친구들과 동료들의 결혼과 출산이 없었기에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여자 나이 33살, 출산하면 34살 아이가 초등학교 갈 때 42살이 되는 나이 많은 늙은 학부모는 되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임신을 준비했다. 대견하게도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임신을 준비하며 남편과 종종 즐기던 술도 끊고 외식을 줄이고 집밥을 먹으며 운동도 해가며 건강한 몸을 만들었다. '우리 아이 갖자'하면 한두 달 안에 가져질 줄 알았는데 6개월이나 걸렸다. 6개월도 길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이를 갖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알았다. 병원의 어떤 도움 없이 임신 준비 6개월 만에 자연 임신을 했고, 태아를 위해 임산부에게 좋다는 견과류, 과일, 우유, 엽산을 챙겨 먹었다. 태교를 위해 생전 안 하던 손바느질, 수학 문제 풀기, 클래식 듣기 등을 해가며 태아를 키웠다. 눈이 펑펑 오는 1월 임신 17주 똥배처럼 아랫배가 봉긋 나왔다. 이 안에 아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매일 아침 이면 뱃속에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가야 잘 잤니? 엄마는 오늘 기분이 좋아, 왜냐하면 널 만나러 가는 날이거든. 눈이 펑펑 오고 있어서 더 좋아. 얼마나 컸을까? 팔다리가 꼬물거리겠지? 딸인지 아들인지 알 수 있을까? 살짝 보여주겠니?’라고 말을 건넸다. 설레는 맘으로 남편과 지하철을 타고 갔다. 눈길이 미끄러워 차를 가지고 가기엔 무리였다. 눈이 많이 와서인지 병원엔 대기가 밀려서 1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남편과 병원 근처 맛집인 기사식당에서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먹었다. 이제 나의 진료시간, 반갑게 맞아주시는 선생님, '아이 얼마나 컸나 볼까요' 초음파를 보는데 '잠깐만요' '심장이 뛰지 안내요' 정적 심장이 멈췄다. 몇 번을 찾아봐도 그 소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심정지 된 태아의 크기는 13주였다. 오늘, 어제 멈춘 것이 아닌 3주 전에 멈춘 것이다. 아이가 죽은 채 내 뱃속에 3주나 있었는데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병신처럼 아침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리지 않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 들어오기 전에도 아이와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미친 듯이 울었다. 운전기사도 남편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랑한 아이가 죽어서 나에게 없다는 것이 나를 떠났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이에게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엄마인 게 싫었니? 왜 갔니? '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집에 오니 시어머님이 오셔서 만들다만 아이의 배냇저고리와 육아 책은 다 치우고 없었다. 며느리가 힘들어할까 봐서 해주신 어머님의 배려였다. 가족의 사랑에도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 태아의 주수가 16주라서 출산하는 것처럼 낳아서 소파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대기실엔 출산을 기다리는 산모가 주수를 다 채워 아이를 만나러 왔는데, 난 바로 옆,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 태아를 꺼내러 왔다. 촉진제를 맞고 자궁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배를 부여잡고 아픔을 참았다. 너무 비참해서 아픔의 신음 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소파수술이 끝나고 나오는데 바로 앞이 신생아실이었다. 이제 태어 난지 2~3일도 안된 아기들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외면했다. 쳐다볼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는데 멈춰지질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이 죄인 같았다. 그래서 눈물도 참았는데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유산이었다.
여자고 엄마가 될 사람이라 마음 추스르고 한약을 먹으며 몸을 보신했다. 아이가 잘 클 수 있는 자궁을 만들며 마음 안정에 힘썼다. 날 좋은 가을에 임신을 했다. 임신 7주가 되어 병원에 가니, 아기집은 있는데 아기가 없는 고사 난자 같다고 했다. 3일 후에 다시 보자고, 그날도 난황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없었기에 마음이 힘들진 않았지만, 무언가 잘 못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6개월 뒤 임신, 또 8주에 심장이 약하게 뛰더니 정지되었다. 그렇게 연이어 5번을 유산을 했다. 이번엔 수정이 잘 안 됐나 봐, 아픈 아이라서 그랬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미련하게 5번의 유산으로 아이를 보냈다.
난임 전문 병원을 찾았다. 선생님과의 첫 대면에서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힘들었죠?”하시는데 눈물이 펑펑 나왔다..'힘들었지'란 그 말이 듣고 싶었었나 보다. 나 스스로에게도 매번 '괜찮아 아직 아이가 아니잖아 형태도 만들어지지 않았잖아 생명을 죽인 게 아니야 , 새끼손톱보다도 작았어, 별거 아니었어' 라며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괜찮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를 보내는 매번 이 힘들었다. 임신이 되지나 말지, 아이를 줬다 뺐어가는 건 뭔지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기다리던 임신을 해도 기쁨보다 걱정이 먼저 왔다. 이번에도 그러면 어떡하지두려움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3년이라는 시간이 10년 같았다. 일도 그만두고 아이만을 생각했는데 반복되는 유산으로 ‘살인을 하는 자궁’, ‘신도 버린 자궁’이라는 아이를 죽이는 죄책감이 나를 살인자로 만들었다. 쓸모없는 인간, 식충이 같이 남편 옆에 붙어사는 삶이었다. 난임 병원에서 한 달이 넘게 호르몬 검사, 자궁내막 검사, 나팔관 검사, 면역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나에게 3가지 불리한 이상소견이 나왔다. 항 인질 성 항체 수치가 낮아서 산소와 영양공급이 잘 되지 않는 저산소증으로 아이가 항상 주수보다 작고 크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아 살해 세포 수치가 높아서 면역물질이 나와 아이를 염증으로 보고 새로 생긴 태반 세포, 정상세포를 죽인다고 했다. S단백질인 혈전 예방 단백질이 일반인에 비해 54%밖에 되지 않아 혈액을 막고 있어 산소공급이 안된다는 3가지 이산 소견이 나왔다. 태아 살해 세포 수치가 높게 나와서 임신이 되면 면역 글로불린 주사와 헤파린 주사를 처방해야 한다는 진단받았다. 검사 후 유산된 원인을 알고 약으로 조절하면 되니 마음이 편했다. 간절함이 이번엔 하늘에 닿았는지 36주까지 잘 잘아주었다. 막달에 쑥쑥 큰다는데 면역주사 끊고 나자마자 아이가 크질 않았다. 태동도 없이 얌전히 내 뱃속에서 견뎌오고 있었다. 또 이러다 심장이 멈출까 봐 겁이 나서 36주 5일에 제왕절개로 2.23kg로 아이를 낳았다. 세상에 나와 준 아이를 처음 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아이가 내 앞에 있다니 보이는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아이를 내 품에 안고 자고 싶고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 산후조리원도 가지 않았다. 출산하고 일주일 후 바로 집에 와서 처음으로 아이를 내 품에 안고 자는데 너무 사랑스러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였다. 내 옆에서 콩닥콩닥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간절히 듣고 싶은 소리였는지 모른다. 지금도 8살이 된 우리 딸의 심장소리는 어떤 음악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을 준다.
엄마라는 말은 정말 특별한 말이다. 엄마란, 누군가 엄마라 불러줘야지 엄마라는 수식어가 생긴다. 얼마나 엄마라는 말이 듣고 싶었는지, 심장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학교도 못 가고 종일 같이 있으니 엄마 소리를 천 번은 듣는 것 같다. 뒤늦게 온 소중한 딸에게서 엄마라는 말을 듣는 숨을 못 쉬게 행복에 겨운 시간이다. 엄마가 되고 싶어서 기다리고 힘겨웠던 그 시간들도 다행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잊혔다.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산후 우울증 나에겐 감히 올 수도 없었다. 우울증이라는 호르몬을 이길 정도로 행복 호르몬이 가득 차있었다. 매일매일이 기쁨이고 기적이었다. 아이가 3살이 되니 둘째 욕심이 났다. ‘건강한 아이 하나만 주세요.’라고 기도 할 때가 언제인데, 사람의 욕심은 끝인 없나 보다. 3번의 임신이 있었지만 모두 유산되었다. 첫 아이 때와 똑같이 약과 주사를 썼는데도 말이다. 죽은 태아의 유전자 검사도 해봤지만 정상이다.
43살 봄 오늘도 어김없이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눈부신 날이다. 딸에게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임신 7주인데 심장이 멈춰서 아이를 놓쳤다. 행복했던 두 달이 이렇게 끝났다. 수술을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부짖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잊고 싶고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살인자인 나와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