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역사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CNN 생중계를 봤다. 이제 곧 전쟁터로 변할 장소가 화면 속에 비치고 있었다. 캄캄한 도시에 불빛이 번쩍했다. 이라크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쟁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폭격이 떨어질 때, 교실의 고 1학년 남학생들은 탄성을 질렀다.
나는 학생들이 훗날 역사에 기록될 한 장면을 동시대에 체감하고 기억하기를 바라며 수업 시간에 방송을 틀어주었다. '명분 있는 전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실의 분위기는 내 교육적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급기야 한 녀석의 입에서는 "XX 멋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시는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이 유행하던 시기이니, 학생들은 실제 전쟁의 장면을 그저 온라인 게임의 이미지처럼 받아들였다.
초임 교사 시절의 이 한 장면이 가끔 생각나곤 했다. 우리가 미국 측의 방송이 아니라, 이라크 측의 방송 장면을 접할 수 있었다면, 학생들이 반응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저 멀리서 전쟁을 '조망'하는 카메라 앵글이 아니라, 그 안에서 숨죽여 떨고 있었을 이라크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여줬더라면, 아이들은 전쟁을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실체는 영토의 변화가 표시된 지도나 물적·인적 손실 통계 자료에서는 다 드러나지 않는다.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전쟁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
이러한 체감에 유용한 장르가 바로 문학이다. 문학은 실제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들을 간접 경험하게 한다. 안전하게 한 발 떨어져 살펴볼 수 있으면서도, 그 인물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을 하게 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는 전선 밖에서 벌어졌던 또 다른 전장에 독자를 데려다 놓는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편지나 일기, 구술 자료와 같은 장르 역시 전쟁의 실체를 간접 경험하기에 유용한 도구이다. 이러한 장르는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읽었다. '한 사학자의 6 · 25 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 교수가 본인이 경험한 한국전쟁을 일기 형식으로 남겨 둔 기록물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사람들의 반응, 6월 28일 서울 점령 당시의 상황, 9월 28일 서울 수복으로 인한 전세 변화에 따른 미묘한 기류를 살펴볼 수 있다.
세상이 누구 치하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빠르게 적응해야 했는데, 그런 시절의 일화들이 지금 돌아보면 부질없는 것들이라 우스우면서도 서글프기도 했다. ‘다마네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가 ‘반동분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이라는 발음 대신에 ‘리승만’이라고 발음해야겠다는 다짐도 나온다. 그러다 서울 하늘 아래 주인이 바뀌어 다시 국군이 수복했을 때는 ‘동무’라는 단어를 썼다가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도 나온다. 또한 안동의 한 학교의 교장은 학교 지붕이 ‘빨간 기와’로 되어 있어, 큰돈을 들여 교체했다는 일화도 나온다. 특정한 단어, 특정한 색깔이 그 사람이 누구 편인지를 규정짓는 요소가 되어 사람의 목숨줄도 왔다 갔다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의 행동에서 빚어지는 씁쓸한 풍경도 있었다. 아이들은 미군이 지나가면 환영의 뜻으로 손뼉을 치는 버릇이 있는데, 죽은 자와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도 손뼉을 치니, 약이 오른 미군은 돌을 집어던지더라는 것이다. 한편, 아이들은 미군에게 좋아한다는 의사표시를 했는데 돌팔매를 받으니 어리둥절해하더라는 것이고. 김성칠은 이 풍경을 보며 '이 역시 민족 비극의 한 토막'이라 적는다.
김성칠은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난 다음인 1950년 10월 대문 앞에 태극기를 내건다. 그러면서 "인공기가 펄럭이던 바로 그 깃대에 다시 태극기를 달아 놓고 적이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끼었으나, 해바라기인 양, 이 깃발 저 깃발 갈아 꽂는 내 몰골이 몹시 서글프기도 하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김성칠은 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쯤 지나, 전쟁이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임을 느낀다고 적어두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내가 절실히 느껴지는 점은, 난리가 났을 때 교묘히 숨느니 보다도 평소에 마을 사람들과 좋게 지내고 또 세상에 아무와도 원수를 맺지 않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살아남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국전쟁을 과연 남과 북의 이념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성칠은 1951년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4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남편의 일기를 세상에 꺼내 놓는다. 그때 그녀는 전쟁이라는 인간 행동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대학원에서 1950년대 북한 미술을 공부하다 보면, 종종 분단과 전쟁 문제와 맞닥트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