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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23. 2024

고마웠어요. 나의 영어 선생님, 톨리.

  내게는 너무 먼 단어가 둘이 있는데, '운동'과 '영어'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꾸준히 해야' 결과를 바랄 수 있다는 데 있겠다. 그리고 해 보고 싶은 마음이 1도 들지 않는 분야라는 공통점도 있다. 내 지인들은 안다. 내가 영어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예전에 베트남 가는 비행기 안에서 누군가 나와 아들을 가리키며 둘이 가족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그만 "I am his father."라고 답했다. 외국인이 내게 말을 걸어오면 긴장이 되기 시작하면서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 번은 괌에 갔는데 식당 직원이 계산할 때, 나더러 change를 원하냐고 물어서, 무얼 자꾸 교환하자는 건가 싶었다. 나중에서야 그 문장이 잔돈 받기를 원하냐는 질문이었다는 걸 알았다.


  대학원에 오니 영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너 건너 영어 회화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나의 영어 선생님 톨리는 한국 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하며 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다니는 인도 사람이었다. 우리 둘 다 나이도 비슷하고 뒤늦게 공부하면서 논문을 쓰는 중이라,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외로움에 대해 서로 다독이곤 했다. 매주 “Is your thesis going well these days?”라고 묻곤 하는데, 톨리와 반년을 만나면서 이 문장만큼은 “How are you? Fine. Thanks. And you”만큼이나 입에 착 붙게 되었다.


  톨리는 벌써 6년 동안이나 붙잡고 있는 박사 논문을 마무리 짓고 인도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동네 커피점으로 노트북을 들고나간다고 했다. 커피 한잔에 1,500원 하는 무인 카페에 가서 하루에 꼬박 9시간을 앉아 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화장실이 내부에 없는 것이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다고 했다. 이에 나는 우리 동네 스터디 카페를 다녀보라고 권했는데, 그녀는 월 10만 원이라는 가격을 듣더니 본인에게는 너무 비싼 곳이라고 했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진척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논문 쓰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고된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표정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톨리와는 매주 1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는데, 교재에 제시된 단어와 숙어를 중심으로 영어 예문을 준비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는 다음 수업 시간에 나눌 대화를 먼저 한글로 작성하고 파파고를 돌린 후 문장들을 외웠다. 한 번은 교재에 look forward to라는 숙어가 나왔다. 나는 며칠 후에 탈북화가 선무를 만날 예정이었던 터라, 그 만남을 무척 '고대하고 있다'라고 예문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확장되기 시작되었다. 


  나는 남북의 분단과 통일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고, 그녀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역사와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의 제국주의적 관점, 식민지 피해국으로서의 역사 인식, 인도의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what”이라고 시작된 톨리의 질문 첫 단어가 점차 “why”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취향’과 ‘경험’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근거’를 물어왔다. 내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이만큼 앞서가는데, 입에서 영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결국 노트북에 파파고 창을 띄워 긴 문장으로 내 생각을 전하곤 했다.


  톨리에게 한국 이름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아직 없다고 했다. 톨리의 풀네임을 물어보니, 인도 이름의 성씨가 sumi라고 했다. 나는 한자로 '빼어날 수'와 '아름다울 미'를 붙여 秀美라고 종이에 쓰기 시작하자, 그녀는 한자를 잘 쓰는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톨리, 네 이름의 뜻은 outstanding beauty야"라고 알려주자, 그녀는 크게 웃었다. 내친김에 톨리에게 톨리에게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인들의 한국식 이름을 알려주었다.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원우두', 헐버트는 '허할보'라는 이름이 있었어. 그리고 언론인 중에 베델이 있는데, 그의 한국 이름은 배설(裴說)이었어.". '설명하다'라는 한자 뜻이 담긴 이름은 그의 직업과는 잘 어울렸으나 한국 발음으로 '배설'은 웃긴 표현이라는 걸 설명하고 싶었다. 이걸 어떻게 실감 나게 이야기해야 하나 하다가 '뿌지직'이라고 하자, 톨리는 끄덕이며 웃었다. 내가 몇 개의 영어 단어만 나열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그녀였으니까.


  어느 날, 톨리는 회화 수업을 당분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아서 인도 고향집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 전에 미리 나누게 될 대화를 파파고를 돌려 외워서 대화를 나누던 나는 이 상황이 갑자기 전개된 것이라 마땅한 영어 표현을 떠올리지 못하고 어버버 하다가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리고 두 달 후 톨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괜찮아졌다는 상황과 좋지 않으시다는 상황의 두 경우에 맞는 문장을 미리 써서 외우고 준비했다. 플랜 A와 B의 영어 문장을 외우고 있는 내가 좀 웃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톨리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내가 미리 준비한 "Long time no see"라는 말로 인사를 건네자 톨리는 안 본 사이에 영어 발음이 좋아졌다며 놀렸다. 몇 개의 단어들과 파파고를 이용해서 그간의 근황을 나누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나는 톨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네가 한국에서 논문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에는 '아마도' 나의 영어 실력이 늘어 있을 테니, 그때 미술관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때 내가 유창한 영어로 한국 회화 작품을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좋다며 엄지를 들었고, 내가 사용했던 단어 중 하나인 'Perhaps'에 대해, "Perhaps, No!" 하며 "Absolutely!"라고 답했다. 나는 “Maybe.... Perhaps….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그녀는 “Absolutely!”를 반복해서 말하다가, 둘 다 까르르 웃었다.


  한 번은 언젠가, 톨리는 심각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비자가 매년 갱신이 되는데, 이번에는 재연장에 문제가 조금 생겼다고 했다. 본인 통장에 유학경비 예치금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에 더 이상 체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그해 12월에 논문 심사가 예정되어 있었고, 비자는 9월에 만료될 예정이라고 했다. 톨리의 계획은 박사학위논문을 마무리 짓고 인도에 돌아가서 논문 내용으로 책을 발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자가 연장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고 이야기하다가, 인도 사람 특유의 커다란 눈이 벌겋게 되어 버렸다. 


  톨리가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무인 카페에서 어떻게 공부해 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톨리의 어설픈 발음의 '어뜨케'라는 한마디에 어떤 절망이 담겨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발개진 눈을 보고 나도 울컥 눈물이 나 버렸는데, 문제는 내가 파파고의 도움 없이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영어 초급자라는 데 있었다. 톨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여러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One more”와 "Slowly"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녀는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천천히 쉬운 말로 풀어서 내게 설명해 주었다.


  며칠 후, 톨리는 비자 연장 문제로 기관 면접을 하러 갔다. 잘 되어도 연락을 주고 안 되어도 연락을 달라고 했다. 유학경비 예치금은 톨리가 소속된 교회 분들이 여러 방법으로 해결해 준 모양이었다. 톨리는 다행스럽게 비자가 연장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박사논문 심사도 통과했다. 언젠가 같이 미술관에 가서 내가 한국 회화를 설명해 주겠다고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톨리는 인도로 돌아갔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파파고가 있지 않으면 영어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대학원생으로 살던 인도의 그녀와 나는 서로의 상황이 비슷해서 많이 다독이며 교감을 나누곤 했었다. 


고마웠어요. 나의 영어 선생님, 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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