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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25. 2024

기나긴 마라톤은 달리는 동료를 보며 견디기


  대학원 공부, 매 순간이 즐거웠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취미로 하던 일이 직업이 되면 괴로워진다고 하던가. 논문을 쓰겠다고 다짐하는 순간부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논문을 쓰는 일은 마라톤 같은 것이라, 한참을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골인 지점은 한참 남아 있었고, 중간쯤 달려왔을 때는 벽에 부딪히면서 과연 내기 이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밀려오곤 했다.


  그럴 때 함께 달리고 있는 동료들에게 '나도 지금 달리고 있다'라는 실시간 메시지를 받으면, 식구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에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일이 덜 외로웠다. 어느 날은 새벽 1시, 단톡방에 흑백의 사진 여러 장이 줄지어 올라왔다. 1950년대 당시 평양미술대학 학장 선우담과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 정관철, 당대 북한 미술계의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이 유화 작품을 구경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시간에 깨어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의 이모티콘을 띄웠다.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1953년 헝가리(웽그리야)에서 《조선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미술전시회가 열렸고 당시 조선화 14점, 유화 53점이 출품되었다. 해당 전시에는 선우담과 정관철이 북측 대표로 참가했다는 사실 정도가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1953년 헝가리에서 《조선의 자유를 위하여》 전시를 준비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톡방에 쏟아진 것이었다. 사람 키 사이즈만한 대형 작품 여러 점 앞에 선우담과 정관철이 서 있는데,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작품은 헝가리 통치차 마자르가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담긴 김용준의 그림이었다. 이 사진을 찍은 헝가리 측은 북한과 헝가리의 우호적 관계를 이 사진 한 장으로 남겨두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 두 사람이 헝가리 미술관에 있는 장면이나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작품 등은 국내에서는 소개된 바 없는 미발굴 자료였다. 이 사진을 발굴해 내고, 그 새벽에 우리 모두를 소리치게 했던 이는 이안나 선생님이었다. 안나 선생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헝가리 국립 아카이브를 찾아냈고, 그곳에서 여러 단어를 헝가리어로 조합해서 검색해 보는 과정에서 이 자료들을 찾아냈던 것이다.    

 

 어떤 날은 안나 선생님이 "베를린 대학 도서관 사서에게 답장을 받았어요."라는 말로 운을 뗐다. 북측 기록에는 1959년 북한이 동독에서 《조선 조형예술전람회》 전시를 열었다는 내용이 있다. 안나 선생님은 독일을 방문했고 그곳 숙소에서 구글 검색을 하다가, 1959년 당시 동독 페르가몬 미술관에서 열렸던 바로 그 전시 도록을 중고 사이트에서 찾아낸다. 당시 전시가 열렸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어떤 작품이 전시되었는지, 동독 사람들은 그 전시를 어떻게 평하였는지를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 도록이 있다면 아직 연구되지 않은 내용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녀는 결재를 마치고 배송을 기다렸다.


  그런데, 중간에 그만 배송사고가 나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면 안타깝다는 생각으로 그저 발만 동동하게 될 것 같은데, 그녀는 독일의 대학이나 도서관에도 도록이 소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독일 베를린 대학 도서관 사서에게 메일을 띄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당신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1959년 발행된 페르가몬 미술관 도록을 스캔해서 보내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안나 선생님은 독일 베를린 대학 도서관 사서에게 답장과 함께 도록 PDF 본을 받아 들게 된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의 대학원생을 위해 스캔 작업을 해서 자료를 보내준 고마운 독일 사서 덕분에, 우리는 《조선 조형예술전람회》 전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안나 선생님이 이 자료를 구해온 과정을 들으며, 상투적인 비유이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떠올려보곤 했다.


  북한 미술 연구 자료는 국경의 경계가 없는 인터넷상의 세계에서 수차례의 가래질을 통해 얻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직접 만나면서 얻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날은 홍성후 선생님이 들뜬 목소리로 "저, 이석호 아드님 만나고 왔어요"라고 했다. 학문마다 특성이 있을 텐데, 근현대 시기 화가를 논문 주제로 삼은 연구자들은 화가의 유족을 만나 증언을 듣고 또는 자료를 수집할 수기도 했다. 이석호는 조선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김은호의 제자로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 거듭 입선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던 화가이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시기,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 제작 노역에 참여했던 탓에 북으로 올라가 버린 사연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반짝이던 스타 화가였다가 월북을 해 버린 화가들의 경우, 한국미술사 연구가 진척되기 어려웠다. 홍성후 선생님은 아직 한편도 나오지 않은 이석호 논문을 작성하고자 했고 그들의 유족을 만나고 온 것이었다. 유족분들의 자택 주소는 어떻게 안 것인지를 물었더니, "이석호는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가현리에서  태어났다."는 구절을 보고, 작가의 고향을 찾아 무작정 그리로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마을 노인정에 찾아가서 "이 동네 어르신 중에, 아버지가 한국전쟁 무렵에 북으로 올라가신 분이 살고 계시냐?"며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결국 화가 이석호의 둘째 아드님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한 청년의 방문에 당황스러울 법도 했을 텐데, 아드님께서는 무척 반가워하셨다고 했다. 아직 국내에 논문으로 정리된 바 없는 아버지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하겠다고 하는 대학원생이 나타나니, 그저 고맙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하셨다고 했다. 한국전쟁 중,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북으로 올라가 버리고 아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집 마당에 빨간 페인트를 붓고 가버렸단다. '빨갱이 가족'이 당해 마땅한, 가해자 입장에서는 당당하고 명분 있는 폭력이 벌어졌다. 육군사관학교에 지원서를 냈으나 입학할 수 없었고, 금강산 관광을 신청하였으나 불허당했다. 자신의 뿌리가 누구인가는 우리 사회가 거절의 의사를 보여줄 때마다 상기되곤 했다.


  월북 화가의 유족들은 아버지가 '강제로 끌려갔다', '납북되었다', '납치되었다'라는 이야기를 강조하곤 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이 몇 달을 사이로 바뀌는 지옥이 전개되었는데, 당시 개인의 행보를 '개인적 의사에 따른 선택'이라고만 몰아붙일 수 있을까. 한국 사회가 해방, 분단, 그리고 전쟁이라는 사건을 관통하며 개인의 삶 그리고 한 가족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살펴보다 보면 서글픈 마음이 들곤 했다.



  이석호 유족 인터뷰를 마치고 온 홍성후 선생님은 부족함이 없게 연구를 성실히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전쟁 시기 북으로 올라간 한 화가의 생애와 작품을 정리하는 일은 한 인간의 삶을 복원하는 일이며, 남은 가족의 상처를 돌보는 일이기도 했다.


남의 나라 아카이브를 뒤적이며 미발굴 자료들을 찾아내는 동료를 보며, 유족 인터뷰를 통해 한 화가의 삶을 복원하려는 동료를 보며, 나의 연구와 논문은 어떠해야 할지, 어떤 마음으로 달려야 할지, 마음을 다잡아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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