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rl + C, Ctrl + V 의 한계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기획안이 통과되기까지 절대 피할 수 없는 질문 하나가 있다.
다른 회사는 어떻게 하나?
함께 일하던 리더 한분은 보고를 받으며 유독 습관적으로 이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듣자마자 머릿속에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재밌는 것은 매번 그 질문을 받고 회의실을 나오던 팀원들은 “왜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까!”라고 자책하지만은 않았다. '이번에도 결국 피해가지 못했네'라는 한탄이 함께했을 뿐이다.
사람은 똑똑한 동물이다. 몇 번을 겪어보면 적의 행동 패턴을 인식하고, 그에 대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대비하지 않았던 우리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당시에는 그 심리적 거부감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리더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타사 자료를 참고한다고 우리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하지만 훗날 벤치마킹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게 된 이유에 대해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거 조금 더 한다고 나쁠 거 없잖아?
고작 그게 힘들어?
직장에서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은 ‘더하기’의 프레임이다. 더하기는 다시 말해 '성실과 열정'의 프레임이다. 무언가 시간을 투자하고, 시도하는 것이 회사에서 나쁘게 보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이 '가'를 '가로'라는 뜻과 의미가 담긴 단어로 바꾸는 것과 같은 혁신이 아니라 '갘'이라든지 '갗'로 바꾸는 등 약간의 획을 추가하는 개선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특히나 상사가 먼저 새로운 방식이나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순간적으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팀원은 많지 않다. 벤치마킹은 더더욱 그렇다. 자료를 추가한다고 나쁠 것이 전혀 없는 정말 거절하기 힘든 업무이기 때문이다.
벤치마킹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나는 함께 일하던 팀장님에게 이런 소리까지 들어봤다.
하기 싫으면 솔직하게 하기 싫다고 얘기해요.
그 당시 이런 대화가 나오게 된 배경에도 첨예한 의견 대립의 지점이 있었다. 작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행정처리 요소를 증가시킬 것이냐, 그 시간에 기획과 개발에 더 전념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나는 팀장님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수용했다가 자칫 내가 맡은 '가'라는 업무가 '갘'이라는 괴상한 글자로 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팀장님은 본인의 의견이 ‘가'를 볼드체 '가'로 만드는 유의미한 일이라고 여기고 계셨다.
내게는 그 당시 볼드체 '가'를 넘어 '가능성'이라는 단어 수준으로 내 업무를 멋지게 발전시키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다. 나의 생각과 방향에 공감하실 수 있도록 설명하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 후에야 팀장님의 의견을 거절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빼자'라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은 '더하기'보다 수십 배는 어렵다. 어떤 상사들은 빼기를 '대충대충, 편하게'의 프레임으로 눈을 흘기며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팀원들은 각자의 '안전감'을 유지하기 위해 "알겠습니다."라는 말로 상사의 요구들을 대부분 수용하게 된다. 그래서 일하는 방식은 점점 누더기가 되어가고, 방향성을 잃은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비극이 탄생하는 것이다. 더하기만이 인정받는 업무 환경에서는 명쾌하고 맑은 철학이 만들어질 수 없다.
경쟁업체의 경영 방식을
면밀히 분석하여 경쟁업체를 따라잡음.
- 네이버 사전 -
벤치마킹의 사전적 정의다. 여기서 우리는 '따라잡음'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상사가 후배들에게 '벤치마킹'을 해오라고 하는 것은 우리 조직의 일하는 방식과 아이디어가 업계 선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그 친구들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우리는 혹은 당신은 만들 수 없다고 인정하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물론 기술적인 면에서 벤치마킹이 필요할 수도 있고, 압도적인 트렌드를 무시하기 힘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리더로서 후배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다면 후배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또 키워나가기 위해 아래와 같은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 우리가 담당한 업무 영역에서는 우리가 업계 최고다라는 마음으로 일하자. 자부심을 갖자.
- 현장을 실무를 제일 잘 아는 우리 팀원들은 자신의 담당 업무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아이디어, 개선/혁신 방안을 갖고 있을 것이다.
유퀴즈에 출연한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님의 말이 인상 깊었다.
"카이스트는 많은 성장을 했지만 전 세계에 나가서 일류 대학이라는 소리를 못 들어요. 1등이 되려면 세계 어디에서도 하지 않는 걸 해야 해요. 모든 구성원들, 학생 구성원들이 '독창적인 것만 하자'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역시 흔한 우수 대학교가 아닌 위대한 대학교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후배들을 복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자로 만들 것인가 이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고 유의미한 일을 해나가는 크리에이터로 만들 것인가?
리더의 말 한마디에 후배들의 마음속에 꺼져가던 열정에 불씨가 살아나기도 하고, 살아있던 불씨조차 재가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과연 잘 알려진, 규모 있는 회사가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회사에서 실행해야 할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다른 회사의 행위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 조직이, 우리의 업무가 처해있는 환경을 이해하고, 지향하는 바를 보다 뾰족하게 다듬는 것이다.
다른 회사에서도 하기 때문에 우리 회사도 한다는 것만큼 일차원적인 생각은 없다. 이는 일에 접근하는 방식과 논리를 키워주지 못한다. 산업군이 같다고 해서 모두 획일화된 방식을 적용할 수 있을까? 각자의 상황이 다르고, 고객의 특성 또한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내가 종사하는 HRD 분야에도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육이 화두다. 하지만 우리는 '메타버스'라는 기술을 맹목적으로 활용하기 전에 그 기술을 통해 교육 참가자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효익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맹목적인 도입은 실무자와 고객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학창 시절 누구나 어려운 문제를 풀 때면 문제집 맨 뒷 페이지의 정답을 펼쳐보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수학 과목의 경우 그 욕구를 참고 문제 해결 과정을 견뎌내느냐 못 견디느냐가 근본적인 실력 향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문제 해결 능력 즉 일머리는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지도 않고, 누군가 매일같이 떠먹여 준다고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부단히 A부터 Z까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사이클을 반복해야 비로소 성장하고, 열매가 맺힌다.
팀원들이 타사의 사례도 조사해보지 않는다고 조급해하는 리더분들을 종종 만난다. 그분들에게 나는 항상 이 말씀을 드린다.
"목마른 사슴은 스스로 우물을 찾습니다."
자신의 업무 혁신과 개선에 갈증이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는 어떤 방법론을 구사하는지 스스로 찾아본다. 스스로 하는 능동적 벤치마킹과 시켜서 하는 수동적 벤치마킹의 결과와 수준은 천지차이다. 스스로 고민의 깊이가 깊어지다 보면 구체적인 아이디어의 구현을 위해 사례를 찾게 된다. 이게 진짜 벤치마킹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상사가 원하는 타사 자료를 찾아보는 길은 꽤나 험난한 오프로드 길이었다. 사회 초년생이 업계 네트워크가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알음알음 선배들에게 연락처를 전달받아 전화로 첫인사를 건네며 어려운 부탁을 하거나 졸업 후 오래도록 연락하지 않은 선배, 동기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때 쓸데없는 감정적 소모를 줄이고, 우리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고객에게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기계적인 벤치마킹은 남의 생각에 의지해 나의 업무를 쉽게 처리하고 싶다는 게으름을 키운다. 우리는 일류회사가 가진 생각을 쫓기보다 우리 고객의 니즈와 상황에 집중하는 힘을, 배경과 목적에 맞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는 힘을 기르는데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