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이끄는 두 가지 방법과 조건
지금부터 당신을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고 가정해보자. 요즘 당신의 최대 고민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에도 두 아이가 도무지 공부에 관심이 없다는 것. 머리를 한참 굴리다 자녀들에게 제안을 해본다.
“앞으로 2주간 각자 원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 결과를 나에게 말해줘. 둘 중 잘한 사람에게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선물을 사줄 거야!”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보상이 아니라 꽤나 파격적인 보상을 들이밀어서였을까? 두 아이의 눈빛은 돌변했다. 그리고 2주 후. 그동안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던데?
첫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전 2주 동안 문제집을 두권이나 빠르게 풀었어요!
둘째 역시 당당하게 대답했다.
문제집 한 권에 2개 챕터를 제대로 공부했어요!
아차.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의 판단 기준을 미리 마련해두지 않았다. 과연 누가 더 잘한 것일까?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선택과 방법들 사이에서 고민한다. 결국 정답이란 없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판단이 가장 최선이었을까에 대한 고민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속도는 가시적인 성과다. 저 멀리 있는 이정표까지 성큼성큼 다가가며 “내가 이만큼이나 왔노라!”하고 보란 듯이 깃발을 꽂는다. 반면, 밀도는 깊이 있게 본질에 다가간다. 속도는 다소 느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쉽게 티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 있는 변화를 위해 뚜벅뚜벅 한걸음씩 나아간다.
첫째에 비해 둘째는 적은 양을 공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면밀히 이야기를 나눠보니 2개 챕터에 담긴 개념만큼은 마치 일타강사처럼 척척 설명해냈다. 쉽게 설명할 수 없으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했다. 둘째는 진짜 밀도 있게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속도와 밀도의 경쟁에서 밀도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아서 종종 평가절하된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목표를 설정할 때, 의사결정을 할 때, 방법을 선택할 때, 평가할 때 속도를 우선순위에 둔다. 속도전에 돌입한 사람들의 머릿속엔 누가 더 많이 했느냐, 더 빨리했느냐, 더 멀리 갔느냐와 같은 양적인 판단기준만이 가득할 뿐이다. 목적과 맥락과 같은 근본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한 고민은 뒷전이 된다.
어린 시절 라면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는 조금이라도 라면을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수프를 먼저 넣는다면 물을 끓이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인터넷의 힘을 빌려 알아본 결과 물의 농도가 높을수록 끓는점 역시 높아진단다. 수프를 넣으면 물을 끓이는 시간이 미세하게나마 더 길어진다고 했다. 높은 밀도를 택하면 필연적으로 변화는 천천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과학의 원리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속도와 밀도 사이에서 고민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속도와 밀도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둘 중 어느 하나에 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여유있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기에 속도가 우선순위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나 역시 교육 담당자로서 올해 교육과정을 몇개나 오픈했는가와 같이 조직에서 제시하는 KPI에 맞춰 속도전에 치열하게 몰두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 내 머리를 띵하게 했던 말이 하나 있다.
He’s powerful and He’s Fast
but precision beats power
and timing beats speed
격투기 선수 코너 맥그리거가 당시 해당 체급의 챔피언이던 조제 알도를 이긴 직후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정확도가 파워를 압도하고, 타이밍이 스피드를 이긴다고 했다. 당시 조제 알도는 10여 년간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오던 난공불락의 존재였는데, 그런 챔피언이 경기 시작 13초 만에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다. 아무리 강한 챔피언도 타이밍 좋게 꽂히는 정확한 펀치를 견뎌낼 재간은 없다.
우리 팀에는 인하우스 HRD 컨설팅을 위한 여러 워킹그룹이 존재한다. 우리의 고객은 회사 내의 조직과 리더 그리고 구성원들이다. 워킹그룹별로 다루는 주제가 참 다양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같은 점이 있다면 고객의 성장을 돕는 공통된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성원과 조직의 디지털 역량을 체계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거나, 리모트 워크 시대에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한 방법, 조직 전반의 직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체계와 방법을 제안하고, 실행한다. 요약하자면 고객이 처한 성장, 조직문화, 리더십 영역에서의 문제를 정의하고, 그에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아서 파는 일을 한다
앞서 설명한 쌍둥이 중학생 자녀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컨설턴트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컨설턴트는 먼저 두 친구가 처한 상황과 목적을 분석할 것이다. 현재 학습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하루 중 총 몇 시간을 공부에 투자할 수 있는지, 시험은 얼마나 남았는지, 원하는 점수대는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고, 문제를 정의한 후 적절한 공부 방법을 제안해줄 것이다. 공부방법에는 왕도가 없다. 각자의 상황과 맥락을 정확히 판단하고, 적합한 속도와 개입 수준을 고려한 최적의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컨설턴트의 능력인 것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팀에서 2개의 워킹그룹이 같은 목적의 업무를 각기 다른 조직을 대상으로 수행하고 있다. 두 워킹그룹의 공통된 목적은 “일하는 방식 개선을 위해 대상 조직에서 협업 Tool 사용을 활성화하고, 활용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재밌는 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한 그룹은 속도감 있게 성큼성큼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한 그룹은 하나하나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일을 추진해나간다.
속도감 있게 추진해나가는 방법은 교육과 워크숍이다. 단 세 번의 이벤트를 통해 전체를 불러모아 왜 협업 tool이 필요하고, 어떻게 쓰는 것이며,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결과물로 도출해낸다.
밀도 있게 추진해나가는 방법은 개입 수준은 높이고, 조직과의 접점 역시 확대하는 것이다. 대상 조직을 구성하는 팀 단위 조직들과의 소통 빈도를 높이고, 리더와 구성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고 반영한다. 이 과정은 일방향이라기보다 쌍방향에 가깝다. 물론 교육과 워크숍을 통해서도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나, 제한된 시간과 집단의 압력으로 인해 개개인의 머릿속에 있는 다양한 생각들을 펼치고 반영하는데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컨설턴트는 필연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선택할 운명 앞에 수없이 놓이게 된다. 같은 목적임에도 방법이 달라야 하는 이유는 대상 조직과 관계의 깊이와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조직과 조직, 컨설턴트와 리더의 관계도 천차만별이다.
최근 유퀴즈에서 소개된 배우 윤여정 씨가 배우 김고은 씨와의 관계에 대해 남긴 말이 진하게 다가왔다.
싹싹하고, 붙임성 좋은 친구들이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이야기였다. 김고은 배우는 먼저 상대방이 나를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을 주고, 상대방의 속도로 배려하며 다가간다고 한다. 그녀는 유독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들과의 접점이 높은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할까도 생각해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본인의 단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꿔 놓았다. 그녀는 상대방에게 맞는 템포로 다가가는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 그래서 호기심이 생기고 알아가고 싶은 사람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했다. 선배가 관심을 보일 때 그제서야 자신을 오픈한다는 김고은 배우. 외향적이지 않은 사람도 다른 방식으로 상대방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 것 같아 유독 그 이야기가 반가웠다.
우리는 살아가며 인간이라는 같은 종으로 분류된 수많은 객체들을 상대하고 있다. 각 객체마다 나와의 관계 속에는 신뢰감, 친밀도, 수용성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세밀한 수준으로 정의되어 있다. 당연히 A라는 객체와 B라는 객체를 대하는 방법은 관계의 깊이와 맥락에 따라 달라야만 한다. 그게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의 표시다.
조직 컨설팅 업무 역시 조직과의 관계 그리고 거대한 맥락 속에서 움직인다. 이미 파도 위에 올라탄 서퍼가 큰 파도에 몸을 맡기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반면 아직 올라타지 못한 거대한 파도를 마주한 서퍼는 막막한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이미 여러 차례 대면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성공사례를 만들어낸 조직과 일하는 방법과 일면식도 없이 처음 관계를 시작하는 조직과 일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밀도 중심의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속도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밀도만의 장점을 취해보겠다는 결심일 것이다. 신뢰자본이 없는 조직을 대상으로 밀도 있게 컨설팅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세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Quick win 과제 발굴 및 포커스
과제의 범위를 대폭 축소해야만 정해진 기한 내에 질적인 수준을 높이면서 성과를 내는 것이 가능하다. 밀도 있는 프로젝트가 스피드까지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효과를 거두면서도, 조직 구성원 누구라도 일상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키포인트다.
2. Top down이 아닌 Bottom up
밀도 있는 컨설팅의 강점은 수면 위만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쌍끌이 어선처럼 바닥까지 흩어진 고기들을 한데 모아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물망이 넓게 퍼진 만큼 이동하는 속도는 현격히 느려지지만 변화의 물결은 그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간다. 표면에서만 이뤄지는 변화는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결국 현장에서 실행하는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이를 적극 수용해야만 변화가 이뤄진다. 더 나은 타이밍과 맥락을 위해 조직과의 접점을 넓혀간다. 리더와만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을 한분 한분 만나 진심을 전달한다. 그들의 의견을 반영한다.
3. 투명한 정보 공유
구성원 모두를 변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참여감을 부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제한된 상황에서 컨설턴트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투명한 정보 공유‘다. 정보 공유를 통해 누구나 변화 과정을 목격하고, 맥락을 파악해 언제든 의견을 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둔다. 설령 의견이 없더라도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로의 생각을 끊김없이 확인하도록 하는 작업은 변화의 생명력을 높여준다.
여기 변화와 조직 역동의 원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첫번째는 혁신 확산모델이다. 이 모델에서는 16%라는 수치가 눈에띈다. 혁신적인 서비스와 제품의 수용 곡선 초기에 위치한 혁신가와 얼리 어답터의 비중이 16%라는 것이다. 이들이 먼저 존재해야만 이들을 따르는 초기 다수 그룹(34%)이 변화를 수용하기 시작하고, 과반수 이상이 변화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 파레토 법칙은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이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탈리아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 빌프레도 파레토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응용해보자면 하나의 게임에서 나오는 매출의 80%는 20% 헤비 과금러에게서 나온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변화관리라는 영역으로 이 개념을 가져와본다면 전체 20%의 영향력있는 구성원만 변화시켜도 80%의 변화가 가능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두 법칙의 핵심 메시지는 변화를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긍정적인 집단’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속도를 빠르게 하든, 밀도를 높게 하든 변화가 수용될 수 있도록 약 20%의 긍정적 집단을 만드는 과정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속도 있는 방법을 취하려면 최소 규모의 긍정적 집단 형성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밀도 있는 방법을 취하려면 긍정적 집단의 전폭적 지지 외에도 다양한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진정성 있고 지속성 있는 변화를 리딩해야 할 것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하는 법이다. 함께 가지 않을 때 변화는 멈추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