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 버티다
작년 여름, 나는 번아웃성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진단을 받기 전에도 후에도 이런저런 기록을 끄적이고 남겨두긴 했었지만 그뿐이었다.
글을 써보고 그림을 그려보려 할 때마다 그저 멍하니 끄적거릴 뿐 어떠한 마무리도 지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기록들만 쌓여갔다.
1년 여가 지난 현재, 간간히 병원을 드나들기고 있긴 하지만 문득 이전에 그런 증상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괜찮아졌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의 상담기록과 함께 그 당시의 나는 어땠는지, 지금의 나는 어떤지 등 이런저런 현실직시와 자아발견을 해보고자 이렇게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간헐적으로나마 연이어 작성할 예정이다.
병원을 찾아가기까지엔 꽤나 많은 고민을 했고 시간이걸렸다.
단순히 정신과를 가는 게 무서워서, 꺼려져서 같은 이유로 고민한 건 아니었다.
이미 그보다 몇 년 전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다녀본 이력이 있던 나에게 방문하는 자체가 꺼려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가지 않고 버텼던 이유는 다시금 내 상태를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이 생각만으로도 지쳤기 때문에, 또 하나는 워낙 약에 대해 부작용도 효과도 잘 나타나는 몸이라 이전 병원에서도 약을 맞추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연세가 좀 있는 선생님이셨는데 본인 의사인생에 약 맞추기 제일 힘든 사람이라고 하셨었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 스트레스 완화와 진정에 좋다는 'L-테아닌'을 복용하면서 혼자 이겨내 보려고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었다.
처음 병원을 찾았던 날, 이런저런 검사지 한 뭉치와 함께 당장 먹을 수 있는 약을 받아왔다.
익숙한 듯 낯선 검사지 틈엔 '문장완성검사'라는 주관식 검사지도 있었다.
차라리 객관식이 편한데 주관식은 은근한 부담과 압박이 느껴졌다.
문장을 이어서 작성하면 되는 건데 생각이 안 나는 것들도 많았고, 생각이 나도 여러 문장이 중복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없이 부정적이고 우울한 글들,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렇게 작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문장들을 고르고 골라 그래도 이 정도면 가장 무난하겠지 싶은 수준으로 제출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태가 심각한 걸 알고 있었으나 처음 보는 의사에게 나의 치부나 우울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었다.
아마도 그랬던 이유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안타깝고 답이 없어서, 그러니까 부끄럽고 창피해서였겠지.
그런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힘겹게 찾아가 받아온 병원 검사지에마저 나는 나의 부끄러운 것들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번아웃성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검사지를 제출하고 상담을 했다.
문장완성검사는 그렇게 안간힘을 쓴 덕인지 이렇다 할특이사항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모든 걸 종합한 진단 결과는 번아웃성 우울증이었다.
심지어 꽤나 중증으로 볼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진단 당시, 담당 선생님의 '번아웃성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라는 한마디를 듣고 순간 멍해졌다.그저 ‘아’ 한마디를 내뱉은게 전부였다.
그리고 이어서 돌아온 결과를 막상 들으니 어떠시냐는 말에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비로소 내가 그간 힘들었던 이유를, 예민했던 이유를, 그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아팠던 거라고 확인을 받아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다시 공황이 심하게 왔구나 생각하던 차에 우울증이라는 애써 피하려던 단어를 들어버려서였을까?
1년이 지났지만 그때 그렇게 눈물이 터진 명확한 이유는 아직도 그저 추측만 할 뿐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갑작스레 봇물 터지듯 터진 눈물이 멈췄을 땐 뭔가 모를 후련함과 함께 꽤나 담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약을 맞춰보기로 하며 두 번째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