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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Sep 03. 2022

잘 나가고 싶은 사람부터 잘 다니고 싶은 사람까지

<이 회사 더는 못 다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당신에게>

‘퇴사러’라는 단어는 한때의 유행어에서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퇴사에 관한 책도 물밀듯 쏟아져 나오고 있지요. 퇴사 후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사람의 성공담부터 감성적인 문장으로 엮은 위로의 손길, 퇴사자가 알아두면 좋은 법 조항을 정리한 책까지.


<이 회사 더는 못 다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당신에게>의 저자 이노우에 도모스케는 정신건강의학을 전공한 산업보건의로서 매달 서른 곳 넘는 회사를 찾아가 직원들의 건강을 관리합니다. 이 책의 특장점은 바로 ‘산업보건의’라는 이력에서 나옵니다. 저자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이들을 도닥이는 동시에 소견서 활용법, 회사에서 붙잡지 못하는 퇴사 사유, 휴직 기간 보내는 법처럼 실용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당장은 퇴사 생각이 없더라도 앞일은 알 수 없습니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사사건건 나를 괴롭힐지도 모르고, 중간 관리직을 억지로 떠맡을지도 모르고, 사무실 이전으로 워라밸이 나빠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취업규칙이나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미리 확인해 두면 몸과 마음에 위험 신호가 나타나더라도 금방 대처할 수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잘 나가고 싶은 사람뿐만 아니라 ‘잘 다니고 싶은’ 사람까지 두루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회사 더는 못 다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당신”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은 돈입니다. “건강이 제일이잖아. 너 정도면 금방 이직할 수 있으니까 얼른 퇴사해.” 남에게 조언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막상 내게 닥쳤을 때 똑같이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제6장 중 상병수당을 소개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상병수당은 근로자가 업무와 무관한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소득 일부를 보전해 주는 제도입니다. 상병수당만 있으면 건강과 생계를 저울질할 필요가 없는 셈이지요.


하지만 기대감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5년 전면 시행에 앞서 일부 지역에서 시범 운영 중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우리나라 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뜻한 위로와 실용적인 조언을 두루 갖췄다는 이 책의 매력도 퇴색할 테고요. 함부로 내용을 빼거나 더하지 못하는 초보 번역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관련 내용을 조사해 구구절절 긴 메모를 남기는 것뿐이었습니다.


증정본을 받자마자 제6장을 펼쳐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다들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제가 간과한 부분까지 보완해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말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자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더 감출 필요 있을까요. 저 또한 수많은 ‘퇴사러’ 중 한 사람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잡지사를 다니며 취재며 기사 작성이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사회생활이 버겁지는 않았습니다. 글 쓰는 일도 잦은 출장도 적성에 맞았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나쁜 사람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맞지 않는 사람이야 있었지요. 하지만 일 처리가 느려 잦은 야근에 일조하던 직원도, 성과만 중시한 나머지 부하 직원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강요하던 직원도, 술잔이나 커피잔을 앞에 두고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 보면 꿈이 있고 일상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기획 회의가 끝나자마자 섭외 전화를 수십 통씩 돌리던 것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악덕 기업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여느 회사처럼 제가 다니던 곳도 절대적으로 좋지도, 절대적으로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저 역시 “질문하거나 휴가를 쓰면 다들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퇴근하고 나면 집안일은 하는 둥 마는 둥 멍하니”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 회사가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물론 회사는 멀쩡히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이 글에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10년, 20년 뒤 제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 30대 잡지 에디터 D의 사례’가 좋겠네요. 제4장 맨 뒤에 살짝 끼워 두는 네 번째 사례처럼 말이지요. 퇴사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퇴사 사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책이 끌어낸 다섯 번째 사례, 여섯 번째 사례… n번째 사례가 “이 회사 더는 못 다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실 이 책은 저의 첫 역서입니다. 증정본을 기다리는 내내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택배 상자를 뜯고 나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제 이름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증정본을 받자마자 제가 납품한 파일과 비교하면서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체크했습니다. 처음에는 연필로 친 동그라미가 늘수록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지만, 점차 ‘이걸 왜 생각 못 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빈도가 늘었습니다.


‘첫 역서니까’라는 변명으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색한 부분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저라고 하는 역자 자체의 부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부족을 메워 나갈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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