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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털이 많다. '많은 것 같다'도 '많은 편이다'도 아니라 그냥 많다. 객관적으로 봐도 많다. 진하기도 진해서 팔을 물에 담갔다가 그대로 들어서 빼면 호랑이 뺨치는 줄무늬가 생길 정도다. 초등학생 무렵 띠동갑인 사촌오빠는 나를 '바야바'라고 불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바야바 정도면 유머러스하면서 귀여운 별명이니까. 굳이 따지자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내 팔을 흘끗 보고는 이야깃거리로 삼아도 될까 계산하는 눈빛이 더 싫다.
털이 많으면 미인이라고들 한다. 그 반증이 바로 나다. 하지만 그런 말이 왜 나왔는지는 알 것 같다.
1. 위로의 의미: 비슷한 말로 '대학 가면 살 빠져'가 있다. 하지만 털이 많아도 미인이 아닐 수 있는 것처럼 대학에 간다고 해서 꼭 날씬해지는 것은 아니다(술살이나 안 붙으면 다행이다).
2. 진한 눈썹: 온몸에 털이 많은 만큼 눈썹도 진해서 화장한 얼굴과 생얼의 괴리가 크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이 눈썹 모양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진한 눈썹도 재능의 일종이다.
일본에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제모 시술 건수가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약 8배 증가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부터 외모를 가꿔야 하는 현실이 못마땅하겠지만 그 나이대에 또래의 놀림은 곧 세계의 붕괴다. 나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고 나서야 팔에 난 털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털을 무지개색으로 염색하든 세 갈래로 땋든 신경도 안 쓸 K 덕분일지도 모른다.
수북한 털을 살려 모델로 성공한 사람이 있다. 인플루언서를 꿈꾼다면 털로 이목을 모아도 좋겠다. 하지만 누구나가 유명해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곧고 부드러운 털로 뒤덮인 내 팔은 제법 근사하지만 더 친해지기 전에는 다른 것들을 먼저 봐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