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노트>와 메모 시스템 재정비
언제부터일까요. '무엇을' 대신 '어디에' '무엇으로' 기록하는지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K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면서 <거인의 노트> 이야기를 했을 때도 가장 먼저 "그래서 어떤 노트에 쓴대?" 하고 물어봤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거인의 노트>는 단순한 방법론보다는 기록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었습니다. 덕분에 다소 기계적으로 유지하던 제 메모 시스템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누군가는 일목요연하면서 구절 인용을 곁들인 장별 요약을 원할지도 모르지만 <거인의 노트>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를 거친(자기화한) 기록'이므로 지금 제 상황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 위주로 하나씩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인상적인 구절을 있는 대로 긁어모으는 것이 미덕처럼 느껴집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잔뜩 모으는 다람쥐처럼 말이지요. 요즘은 검색 기능도 잘되어 있으니까 키워드만 기억해 두면 필요할 때마다 재깍재깍 찾아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듭니다.
하지만 <거인의 노트>에서는 책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기보다 자기의 언어로 풀어서 메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자기화는 <제텔카스텐>을 비롯한 다른 기록에 관한 책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는 원칙입니다.
<거인의 노트>에서는 책 내용을 자기화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곧바로 노트를 펴서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챕터를 읽은 다음 자신의 기억을 되짚고 해당 챕터의 얼개를 고려하면서 중요하다 싶은 내용을 키워드로 요약하고 자기의 언어로 메모합니다. 책을 완독하고 나서 챕터별 요약을 모아 A4 용지 두세 장 분량으로 재정리하는 과정까지 마치면 책 메모는 끝입니다.
기억에 의존하다 보면 사실과 다르거나 빼먹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 걱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내게 필요한 내용이라면 한 챕터를 읽는 짧은 시간 정도는 머릿속에 꽤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사실과 다르게 쓰는 것에 관해서도 저자는 오독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독도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오독을 유도하기 마련인데, 그 원인이나 기저에 깔린 심리를 파고드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메모거리가 생기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두고 메모할까 말까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부 적으면 되니까요. 중요한 것은 나중에 다시 봤을 때 내용이 떠오를 수 있을 정도로만 적으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메모가 아니니까요. 가지런하고 조리 있게 쓰려고 애쓸 것 없이 요점만 명확하게 적어 두면 됩니다. 실제로 책에서도 메모의 원칙으로 '키워드 위주'와 '간단하게'를 강조합니다. 구구절절 남기다 보면 금방 지쳐서 메모 습관을 정착시키기 힘들겠지요.
머리에 있는 내용을 온전히 노트에 옮기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릴 바에야 온전하지 않더라도 생각의 실마리나마 붙잡고 있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메모의 대상은 무궁무진합니다. 거창한 견해나 일과 연관된 내용만 메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화하다가 무심코 튀어나온 말 중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싶은 기발한 내용이라든지, 평소처럼 기계적으로 집안일을 하다가 '방식을 이렇게 바꿔 보면 좋을 것 같은데?' 하고 떠오른 아이디어도 메모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책을 읽기 전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메모의 분류'입니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잠깐 기억하려고 적어 둔 것이 메모라면 조각 글을 모아 정리한 것이 기록이라고 하니,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의 영역에 접어든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메모를 대단히 많이 하지도 않으면서) 듀이십진분류법 뺨치는 메모 분류법을 구축해 두지 않으면 뒤죽박죽이 된 메모의 산에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텔카스텐에 대해 알게 되어 관련 도서를 읽기도 했지요. <거인의 노트>에서도 메모 분류법이 짧게 언급됩니다. 우선 한곳에 자기화한 메모를 쏟아 놓은 다음 틈틈이 메모를 되돌아보면서 일 노트, 생각 노트 등에 분류해서 적습니다. 그 과정에서 메모가 정리되고 자신의 생각이 추가됩니다.
<거인의 노트>를 읽으면서 지금 제 메모 시스템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메모는 노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2020년 9월에 올린 글 '불렛저널, 이사합니다'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지요. 불렛저널도, 장보기 목록도, 먼슬리 트래커도, 독서 목록도, 소설 소재 관리도, 긴 글 작성도 모두 노션에서 이루어집니다.
다 떨어진 샴푸를 발견하면 휴대폰 노션 앱을 켜서 불렛저널 오늘 날짜에 '샴푸 사기'라고 대충 메모해 둡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만들고 싶은 음식이 생겨도 불렛저널이고, 문득 떠오른 괜찮은 문장도 불렛저널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샴푸 사기' 같은 할 일은 불렛을 달아서 정리하고, 사야 하는 식재료는 가족 구성원인 K와 공유하는 레시피 노트로 옮깁니다. 괜찮은 문장은 글쓰기 노트의 칸반 보드 중 '글감' 카테고리로 옮깁니다.
책 읽을 때를 살펴볼까요. 인상적인 구절이 나오면 소장본일 경우 책에 직접 메모하고, 빌린 책일 경우 휴대폰 메모장에 쪽수를 적어 둡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노션 '2024년 독서 목록' 테이블에 노트를 만들고 책 제목, 저자, 완독일, 키워드 등을 정리합니다. 노트 내용에는 인상적인 구절들을 나중에 활용하기 쉽도록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겨 둡니다. 길게 풀어내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일기장과 만년필을 꺼냅니다.
그림으로 정리해도 중구난방이네요. 기록을 남기기는 하지만 메모는 머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임팩트가 강하거나 몇 번씩 제련된 생각만 기록으로 남다 보니 그 기록이 글로 연결되는 확률은 높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새롭게 떠오르는 다른 생각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다가 서서히 풍화됩니다(화살표의 굵기 차이 참고). 말하자면 중간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지요.
여기에 <거인의 노트>에서 설명하는 원칙을 따라 생각나는 것을 있는 대로 메모하는 과정을 더하면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생각까지 모두 망라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갈무리에서 그치지 않고 틈틈이 메모를 다시 읽어 보면서 분류와 리마인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 관계없어 보이던 메모들이 별자리처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새로운 글감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사실 노트에 펜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몇 번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노트에 어느 정도 메모가 쌓이면 브런치에 올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남들이 봤을 때 '잘한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깔끔하면서 논리정연하게 적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년필로 쓰기 시작하면 끝까지 만년필로 써야 한다는 이상한 고집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노트에도 자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큰맘 먹고 표지를 꾸며 봤습니다. 다꾸와 거리가 멀고 센스가 부족하다 보니 어설픈 부분투성이지만 '나만의 노트'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애착이 생기네요. 이제 이 노트를 저만의 메모로 채워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