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경찰의 재난현장 근무일지 - 비닐장갑
2021년 1월 4일 월요일
진료소 근무를 투입하자마자 K형이 아침부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비닐장갑 뭉치의 손목 부분에 구멍을 내려고 했다. 송곳이 없어 진료소에 비치되어있던 가위를 벌려 한쪽 날로 열심히 돌리고 있던 것이다.
“왜 거기에 구멍을 내려고 하세요?”
“손이 너무 시려서 도저히 장갑을 직접 못 나눠주겠어.”
선별진료소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우선 비닐장갑을 껴야 한다. 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피검사자끼리 또는 검사자와 피검사자 사이를 상호 감염에서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 비닐장갑은 안내를 담당하는 사람이 나눠주기로 되어있는데 사람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 비닐장갑을 계속 들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1월이 되고 한파가 자주 몰아쳤다. 종일 라텍스 장갑을 끼고 바깥에 있는 것 자체로도 손은 충분히 시리다. 그래서 대부분은 핫팩을 까서 손에 끼고 있지만, 비닐장갑을 손에 한 뭉치 들고 있으면 핫팩의 온기가 전달되지도 않을뿐더러, 비닐장갑 자체가 얼음덩이처럼 변해 손을 더 시리게 한다.
이것을 참지 못한 K형이 해결방안을 생각해낸 것이다. 근무에 투입하는 동기 넷 모두가 그 고충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새 의기투합하여 함께 장갑을 붙잡고 가위를 돌려대기 시작했다. 덩치가 산만한 장정 넷이 옹기종기 모여 비닐장갑과 씨름을 하며 열을 내는 모습이 다른 사람 보기엔 시트콤 같았을지 몰라도 우리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렇게 10분이 넘게 끙끙 댄 덕분에 비닐장갑에 구멍을 뚫었고, 케이블타이를 이용해 입구에 매달아 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비닐장갑을 들고 있을 필요가 없어져서 손이 한층 편해졌다.
하지만 K형이 시도한 이 방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우선 장갑에 구멍을 뚫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하루에 예상되는 피검사자의 수는 600명이 조금 안되는데, 50장의 구멍을 뚫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들었다. 불에 달군 송곳같은 도구가 있다면 쉬웠겠지만 이곳에선 날이 잘 들지 않는 가위뿐이었다. 이유가 이것 뿐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방문하는 민원인들이 장갑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한 채 진료소 안으로 진입해버리거나, 장갑의 위치를 찾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며 질서만 망가졌다.
결국 아침부터 시도한 장갑해방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버리고, 안내를 담당할 때마다 비닐장갑을 한 뭉치씩 들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