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성한 Feb 29. 2020

버스도 과학입니다

호주 멜번에 사는 한 버스기사의 삶 이야기

295번 노선은 돈카스터(Doncaster) 지역의 주택가를 두루두루 돌지만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한국으로 치면 마을버스 정도의 노선이다. 토요일에는 버스 한 대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번, 그리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한번 하면 시간표를 감당한다. 시간에 한 대씩만 배치되니까 가능한 일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혼자서 네 번 왕복하면서 4시간을 운행하고, 식사 이후에 다른 노선으로 배치되는 근무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평일에도 이용객이라고는 등하교 시간대의 학생들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295번 노선이니, 거기다 토요일이니 그냥 혼자서 라디오나 켜놓고 오전 시간을 즐기려 하였는데, the Pines를 떠나자마자 할머니 한분이 버스정류장에서 손을 흔든다. 라디오 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다가가 바로 앞으로 버스를 댄다. 문을 염과 동시에 버스를 확 낮춰준다. 굿 모닝 하면서 버스에 오른다. 편한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문을 닫고 버스를 출발한다. 라디오 음악소리에 맞춰 즐겁게 운행하려던 계획은 일단 접어두고, 할머니 크루즈 모드로 조심스레 운전한다.


쇼핑센터에 가시려나 하차벨이 울리질 않는다. 쇼핑센터로 향하는 대로로 빠져나오니 마침 승객이 보인다. 천천히 차를 대고 미소와 함께 오른 승객의 교통카드(Victoria 주는 Myki Card)를 충전하는 와중에 아까 그 할머니가 그 뒤로 황급히 하차한다. 왜 벨을 안 누르셨을까? 쇼핑센터에 도착하여 뻐근한 다리를 한번 펴고 다시 반대편으로 빈 버스로 출발한다. 라디오를 다시 키우고 주말 모드로 주행을 시작하고 좀 즐기려는데, 아까 그 할머니가 아까 내린 버스 정류장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서 또 손을 흔들고 있다. 라디오 소리를 줄이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친절한 버스기사로써의 의무를 다 한다. 할머니는 나를 기억 못 하시는 것인지 밝게 굿 모닝 인사를 하면서 또 올라선다.


라디오 소리는 죽이고 태세를 전환한다. 구름을 타고 여행하듯 운행을 한다. 과속방지턱은 사뿐하게 지나치고 열어둔 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앞마당 이쁜 집들의 꽃나무가 크게 보이고, 아스팔트로 약간씩 드리워진 그늘도 이쁜 색깔로 눈에 들어온다. 제목을 모를 콧노래가 슬슬 나오고 이윽고 종점에 도착하는데,

잠깐만... 할머니 어디 가시는 거지?

종점에 차를 참하게 대어놓고 앞 뒷문을 열어두니 할머니가 물어본다.


너 이제 운행이 끝난 거야? 아니면 다시 돈카스터로 돌아가는 거야?

다시 돌아가는데요.

그럼 나 여기 계속 앉아 있어도 되는 거지?

그럼요.


할머니를 방해하려는 손님이 하나도 없다. 승객 한 명 만을 태운 295번 버스는 다시 the Pines를 떠나 돈카스터로 향한다. 상쾌하다. 이번에는 이 할머니 내리시겠지. 어디든 내려주리라. 혹시 벨소리가 안 들리는 건가? 아까 차고 나올 때 분명 다 확인했는데. 할머니 자리만 벨이 고장인 건 아닐까? 아니지, 그러면 할머니가 뭐라 이야기했겠지. 앗! 벌써 돈카스터에 도착했다. 앞 뒷문을 활짝 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온몸을 쭉 펴고 또 다른 상쾌함을 맛본다. 할머니가 앞 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너 이제 운행이 끝난 거야? 아니면 the Pines로 돌아가는 거야?

네, 다시 돌아가는데요.

그럼 나 여기 타고 있어도 되는 거지?

그럼요. 그런데 어디 가세요?

응, 딸네 가는 거야.

딸네가 어딘데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러면 고맙지.


아까 출발하듯 다시 출발한다. 버스가 두둥실 구름처럼 움직인다. 이번에는 꼭 내려드리리라 마음을 먹는다. 금방 할머니의 정류장이 눈에 들어온다. 정성껏 조용한 움직임으로 버스를 대고, 문을 열고, 버스를 낮추고, 할머니를 부른다.

조용하다. 할머니의 발소리가 들리질 않는다. 캐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본다. 할머니가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않는다. 조용히 다가가는데, 주무시는 듯하다. 손가락 두 개를 조용히 할머니 어깨에 대어 본다.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아주 숙면을 취한 표정이다.


여기 다 왔어요. 어젯밤에 많이 바쁘셨나 봐요.


할머니가 가방을 챙기고 자리를 나선다. 한마디 한다.


이건 니 잘못이야. 네가 버스를 너무 편하게 운전해. 하며 하얀 건강한 치아를 드러낸다. 나도 웃음이 나온다.


손을 흔들어주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라디오의 볼륨을 올린다. 버스는 다시 구름처럼 움직이고, 승객은 보이질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정직원이 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