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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한 Jan 08. 2020

200번 버스, 사람전시관

멜번에 사는 한 버스기사의 삶 이야기

여러 선배 버스기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좋아하는 노선과 싫어하는 노선이 갈린다. 한국에서처럼 한 노선만을 주구장창 운전하면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하루에 많게는 서너 개의 다른 노선을 운전하다 보니 선호도가 생기는 것이다. 그중에 한 노선이 200번 버스이다. 멜번 도시에서 동쪽 편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속도로를 통하지 않고 시내로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노선이다.

200번 버스노선을 구글지도에서 캡쳐해봄

뭐, 다들 싫어하는 노선이다. 싫어하는 이유는 콜링우드(Collingwood)라는 지역을 지나기 때문이다. 콜링우드는 예전에는 대표적 우범지대 중 하나였다. 도시의 험한 일을 하던 노동자들이 시티 먼 곳으로 거주지를 잡기는 어려우니, 도심 가까이 자리 잡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 도시에나 있는 것처럼 할렘 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시티에서 가까운 저소득층이 자리 잡은 지역, 그 덕에 술과 마약 등이 판을 치는 동네였다.


멜번 곳곳에 일부러 퍼뜨려놓은 정부 주택들이 있다. 한 곳에만 몰려있으면 그 지역이 험한 동네가 될 가능성이 크니, 옅게 퍼뜨려놓아 사회와의 격리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다. 그런데, 이 콜링우드에도 정부 주택들이 많이 있고,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험한 동네가 더 험해진 것이었다. 과거형이다.


지금 콜링우드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폭발적인 멜번의 인구 증가, 그러면서 급속도로 늘어나는 도심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고, 예전에 사용하던 낡은 창고 등이 레트로한 카페나 레스토랑 등으로 거듭나면서 수많은 미식가들이 몰리는 동네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젤라토 집이나 아내가 좋아하는 인도 카레집, '최애'라는 표현의 가장 적합한 크루아상 집, 모두가 이 동네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바뀐다는 것이 이전의 것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 콜링우드는 양단의 문화가 버티고 있는 동네이다. 패셔너블 한 전문직 종사들로 주말이 채워지기도 하지만, 마약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들도 동네 한 자리를 차지라고 있다. 그 지역을 관통하는 200번 버스.


이 콜링우드를 진입하기 전 버스가 지나는 지역은 큐(Kew)라는 지역이다. 도심이 그래도 가깝고, 나무가 잘 우거진 동네, 대표적인 멜번의 부자동네 중 하나이다. 백인들 중산층 이상이 많이 살고, 사회 각 부분의 유명인들도 많이 사는 동네이다. 실은 나도 이 동네에서 한 동네 떨어진 어딘가 언저리에 자리 잡고 살고 있다. 환경이 그만큼 좋기 때문에 언저리에 언저리에 살면서도 그 만족도가 높다. 200번 버스가 이 지역을 통과한다.


큐에 진입하면서부터 양복을 잘 차려입거나, 나름 치장을 잘 한 어르신들, 그리고 깨끗한 엑센트를 가진 젊은이들이 버스에 오른다. 어지간히 비싼 차도 가지고 있겠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솔선수범'형 시민이라고 할까? 어르신들이 차에 오르면 버스 앞쪽으로 위치한 노약자석이 빠르게 비워진다. 버스기사에 대한 인사성도 아주 밝다. 보통은 고개만 끄떡이는 이 동양인 운전자도 어쩔 수 없이 굿모닝, 하우아유, 게데이(Good Day의 준말, 전형적인 호주 영어 중 하나)를 남발한다.


초록 지역을 잠시 지나 콜링우드 지역으로 진입한다. 도심의 일자리에 근접하여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과 우버를 놓친 젊은이들, 열심히 재활 중인 사회의 취약계층과 더불어 마약중독자들이 승차하기 시작한다. 담배를 물고 버스에 오르려는 것을 충돌 없이 막아야 하고, 무임승차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고차원적인 질문에 잘 응답해야 한다. 천만다행으로 나에게는 아직 큰 사고가 없었지만, 선배 기사들의 경우는 별의별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덕에 내가 근무하는 차고지에서는 최악의 노선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나는 이 노선을 퍽이나 좋아한다.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한 번에 만날 수 있으니 좋고, 지루한 버스운전이 나름 미니시리즈 마냥 드라마틱하여서 좋아한다. 하차벨을 누르지도 않고, 고래고래 다음 정거장에 세워달라고 떼쓰는 어른을 태우고 가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당신은 아는가? 담배에 불을 붙이지는 않고 라이터만 칙칙 긁어대는 사람을 감시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는가? 오늘은 산발머리 사이로 시꺼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올라타 큰 눈으로 쳐다보니 요즘 산불의 여파로 공기가 너무  탁해서 자신 같은 천식환자들은 이런 마스크를 꼭 해야 한다고 묻지도 않은 질문에 상세히 대답을 해준다. 평소 같으면 빨리 가야 하니 앉아서 이야기하라 했겠지만, 바로 옆 승객이 본인 가방 어딘가에 박혀있을 교통카드를 찾느라 버스는 어차피 정차 상황, 친절히 그 설명을 들어주었다.


지난 연말, 회사에서는 대중교통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고 다시 강조하는 지침을 전 기사에게 내려보냈다. 안전을 위협한다거나 하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승차를 거부할 수 없다는 지침이었다. 부자이건 가난뱅이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마음이 아픈 사람이건, 젊은이건 오르신이건, 모든 사람들이 오르는 200번 버스는 참으로 재미있는 버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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