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勞動歌)
"남 탓을 많이 하는 편이세요?" 어느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이다. 나의 답변들이 싹수가 없어 보였던 건지, 압박면접의 일환이었던 건지, 순수하게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던 건지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대학교 때까지는 남 탓을 할 일 자체가 없었다. "개인의" 성취도에 따라서 평가를 받는 시스템인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나의" 실력에 따라서 평가받으며 자라왔다. 사회에 나가기 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불합격하는 과정에서도 남 탓의 여지는 없었다. 2년 반의 공무원 수험생활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순전히 나의 실력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직장에 오고 나서 갑자기 사람이 변했다. 남 때문에 야근하고, 남이 하던 일을 수습해야 했고, 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남 때문이었다.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부서에 자리에 가면 "내가 보기에" 늘 터지기 직전의 일들이 지뢰처럼 존재했다. 나이스한 인수인계는 바라지도 않았다. 지뢰처럼 남아있는 일들이 내가 수습 가능한 일들이 기를 바랬다.
회사에서는 적절한 보고와 주변 사람들에 도움을 청하는 등의 포지셔닝으로 그런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도 회사에서는 실력의 하나다. 하지만 나는 실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해결을 해 나갔고 그 과정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나의 분노는 내가 새로운 자리에 오기 전까지 이런 지뢰를 곳곳에 심어놓은 구조와 구조를 만든 사람들을 향했다.
문제 해결에 대한 보상을 못 받는 명확히 예상되는 결과도 "남 탓"의 또 다른 원인이었다. 내가 공식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회사에 명확하게 "문제"상황을 인식시키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면 회사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공식화하고 "문제"상황을 일으킨 사람들을 문책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내가 동료들의 무능을 질책하는 주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행동이 또다시 나에게 어떤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지 모른다. 결국 후임자로 온 나는 같이 지뢰를 심고 싶지 않고, 동료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할 자신도 없기 때문에 조용히 "문제"없는 상황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 "문제"없는 상황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그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은 남 탓 하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이상한 프레임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에게 문제를 찾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어쩌고 저쩌고..."와 같은 훈계를 종종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계속 회사생활을 하는 한 나의 고독한 문제해결 과정은 계속될 것 같고, 그 과정에서 남 탓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남 탓을 많이 하는 편이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