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의 끈적한 물기가 가득한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정류장에서 하얀 천막이 드리워진 집이 보이자, 눈물이 멈췄다.
‘어, 왜 지금 멈추는 거지? 지금은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아닌가? 나 울어야 하는 거 아니야?’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슬픔이 슬픔을 먹어 치운 날 눈물도 사라졌다. 비현실이 현실이 된 날 나는 울지 않았다.
대문 앞에는 활짝 핀 국화로 장식된 조화가 줄지어 있었다. 놓을 자리가 없어서 조화는 밀리고 밀려 오는 사람을 환영하듯 두 줄로 서 있었다. 죽은 사람은 볼 수 없는 꽃들. 상갓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놓여있는 꽃을 보고, 죽은 이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존경받았는지를 짐작한다.
할머니는 드라마를 보실 때마다 한마디 거드셨다.
“야, 지천으로 널린 게 꽃인디. 뭐 할라고 비싸빠진 저 꽃들을 사는지 모르겄다. 봄에 밭에만 나가봐라 하얗게 핀 냉이 꽃이 얼매나 이쁜지. 걷기만 해도 이쁜 게 천지데. 뭐 할라고 비싼 꽃을 사는지.”
공짜 꽃을 평생 누리고 사신 할머니에게 꽃을 사는 것은 돌멩이를 돈 주고 사는 것과 같았다. 그런 할머니가 정작 세상을 떠나자, 하얀 꽃들이 밀려 들어왔다. 죽은 이가 머무른 공간에서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뻔하다.
집에 들어서니 장례식 준비로 떠들썩했다. 모르는 사람이 왔으면 잔칫집인 줄 알았을 것이다.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았다. 거실에 들어서자 할머니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그곳에는 더는 숨이 붙어 있지 않은 할머니가 누워계신다.
손님을 맞느라 바쁜 부모님을 피해 창고에서 음식 준비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셋째 왔구먼. 밥은 먹었대?”
“밥생각이 없네요.”
“야, 어여 먹어라, 니 아버지가 할머니 보러 오신 손님들 맛나게 먹고 가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 손수 만들고 있잖어. 맛나니 어여 먹어.”
윗집에 사시는 동수 아주머니가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나에게 내밀었다. 밥생각이 없다는 내게 한사코 숟가락을 손에 쥐여 주셨다. 깨작깨작하며 밥알을 세었다. 창고에는 동수 아주머니 말고, 이 씨네 아줌마, 근월이 언니 아줌마, 예성이네 할머니가 계셨다. 예성이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으시다.
아무리 태어날 때 순서가 있다고 하지만, 다섯 살은 많은 예성이 할머니는 여전히 뒤집개로 부침개를 부치고 계셨다. 태어나는데 순서가 있는 것처럼, 죽을 때도 순서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순서가 정해진 죽음은 어쩔 수 없지, ‘왜’라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 당연한 것은 받아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