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이 짜진다고 어머니가 물 몇 바가지를 국에 부으라고 하신다. 수도꼭지를 틀자, 윙윙 모터 소리가 돌아간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바가지로 받았다. 넘칠 듯 말 듯 받자, 몇 걸음 떼자 바가지 밖으로 물이 흘러내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내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낮 동안에 내 안에 차 있던 것들이 더는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다시 바가지 밖으로 물이 넘쳐 흐른다. 나도 한 걸음, 두 걸음. 다시 눈물을 흘린다.
걸음을 떼자 바가지에도 물이 넘치지 않는다. 나도 울지 않는다. 마른 바닥 위로 물 자국이 박혀있다. 나의 볼에도 있다. 나의 볼에 흘렀던 것은 조금은 뜨거운 것이었다.
솥뚜껑을 열고 물을 부었다. 쏴.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가 사라진다. 몸 안에 있는 눈물이 하얀 김처럼 끓어올랐다가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며,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바닥에 물 자국은 더 짙어질 뿐이었다.
어머니가 부르신다. 어머니의 어머님도 부른다.
“어매야, 이리 와봐라.”
어머니 덕분에 수술을 받으신 할머니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자신을 살렸다고 자랑했다.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그런 며느리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어머니는 노할머니라고 부르는 시할머니와도 함께 살았다. 가난한 집에서 시집왔다고 노할머니는 어머니를 못 마땅해했다. 밥이 설익었다, 국이 짜다, 빨랫감이 더럽다고 타박을 줄 때마다 할머니는 역정을 내며 어머니를 감쌌다. 노할머니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렸다.
그런 노할머니도 아버지는 끔찍하게 대하셨다. 어머니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날이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는 더위를 피해서 마루에 앉아 있었다. 허리가 반쯤 구부러진 노할머니는 쟁반에 수박 반쪽을 썰어 오셨다.
아버지는 수박을 한 입 베어 먹고, 입에 맴도는 수박씨를 ‘퉤’하고 마당으로 뱉었다. 마루에 걸터앉으셨던 노할머니는 구부러진 허리를 더 굽혀 아버지가 뱉으신 수박씨를 하나 줍기 시작했다. 아버지 입에서 까만 씨가 튀어나올 때마다 노할머니는 씨가 착지한 자리로 느린 걸음을 옮겼다.
이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야, 노할머니가 무서워도 네 아버지라면 끔뻑 죽으셨어. 그날 아버지가 수박 다 드실 때까지 수박씨 하나하나 줍고 있는 모습 보니 노할머니가 아주 밉지는 않더라. 주우시면서 어찌나 웃으시던지. 누가 보면 바닥에 떨어진 돈이라도 줍는 줄 알았을 거야. 하도 내가 니 아버지 하는 꼴이 우스워서 뭐라고 했잖니. 나이 먹고 그 짓이 뭐냐고. 내가 니 아버지 사람 만들었어.”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버지는 여전히 방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으면 일일이 줍고 다니실 정도로 깔끔한 성격이시다.
늘 어머니의 방패막이 되어 주신 할머니는 어머니가 오 남매를 낳으실 때는 친정어머니도 되었다. 나를 낳은 날,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부탁하셨다.
“어매야, 이제 아이는 그만 낳자. 아들 없어도 괜찮다. 낳을 때마다 힘들어하는 거 못보겄다.”
“어머니, 저 낳을 거예요. 저 양반, 이 여자 많은 집에 아들 하나는 있어야죠.”
할머니는 대를 이을 손자보다 마른 어머니의 몸을 더 걱정해 아들 낳는 것을 말렸다. 어머니의 고집은 누구도 꺾지 못했다. 김을 메야하는 밭이 있으며 해가 산너머로 꼴딱 넘어가도 기필코 밭에 남아있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내 뒤로 딸을 하나 더 낳았다. 또 딸이어서 실망한 어머니는 첫째, 둘째, 셋째의 이름이 돌림자를 써서 아들이 안 생기는 것 같다며, 여동생의 이름을 바꾸었다. 여동생은 ‘실’로 끝나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 덕분인지 다섯 번째로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았다.
육개장 솥에 모여있는 오남매를 보시더니 어머니는 밤도 깊었으니, 내일 손님 맞을 준비를 위해서 자라고 했다. 할머니 방에 할머니가 있기에, 안방에 들어가서 어머니 옆에 누웠다. 피곤해서 하품은 나오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야, 너 그거 아나? 네 할머니가 같은 시어머니 어디에도 없다. 그 시골에서 애 낳을 때마다 얼매나 일손이 달리는지 아나. 애 낳고 며칠 지나면 밭에 나가야 했다. 그런데 네 할머니는 달랐어.”
“우리 할머니는 어땠는데?”
“니 할머니는 한 달 동안 나 방에서 못 나오게 했어. 더운 날에 니들 낳아도 내 몸에 바람들어가면 안 된다고 군불을 어찌나 뜨겁게 때는지. 너무 더워서 찬물 한잔 먹을라치면 할머니가 뛰어와서 말렸어.”
“와, 우리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한테 사랑이 남다르셨네.”
“그건 만 있게, 니들 오 남매 낳을 때마다, 한 달간 하루도 안 빼고 미역국을 끓여 주셨잖니. 한 달 내내 먹는 게 지겨워서 그만 먹겠다고 해도, 니 할머니는 무조건 한 달은 먹어야 한다고 한사코 끓여주셨어. 내가 지겨워하는 거 알고, 어떤 날은 소고기, 어떤 날은 조개, 어떤 날은 들깨 넣어서 끓여주시더라. 네 할머니 같은 분 시골구석에 아무도 없었어. 다들 나 부러워했잖아. 인정어매는 뭔 복을 타고났길래, 저런 시어머니랑 사느냐고.”
“어머니는 좋았겠어요.”
“좋았지. 좋아도 너무 좋았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좋았지에 머물면서 서서히 음이 사라졌다. 북적이는 공간과 달리 할머니 방에는 할머니만 있다. 할머니는 또 그 안에서 또 다른 방 안에 있다. 산사람이라면 휘저을 수 없는 공간이 없으니 갇혀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