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무를 뽑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발길은 멋대로 할머니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할머니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결국, 열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오자, 높낮이가 다른 숨소리와 함께 흐느낌이 들렸다. 여동생이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할머니는 우리 오 남매에게도 각별했다. 결국, 어머니의 꺾이지 않는 의지 덕분에 다섯째로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할머니는 남동생과 우리를 차별하지 않았다. 맛있는 것이 생겨도 똑같이, 일을 시켜도 똑같이, 할머니의 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할머니는 늘 균형 잡힌 저울이었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딸기할매’로 불렸다. 산 끝과 맞닿아 있는 곳에 딸기밭이 있었고, 할머니는 봄볕에 잘 익은 딸기를 따서 장에 파셨다. 장에 가시는 날이면 이슬이 촉촉이 젖어 있는 딸기를 정성스레 땄다.
장에서 돌아오는 할머니가 빈손으로 오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딸기를 팔아서 ‘딸기할매’가 되었지만, 할머니가 장에서 유명했던 이유는 손녀, 손자 줄 간식거리를 매번 사서였다. 다섯 명분이었으니 그 양은 늘 적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와 약속한 시각의 버스를 타고 오셨다. 할머니를 태운 버스가 올 때쯤이면 우리는 똥차라고 불렀던 외발 수레를 끌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상관없이 할머니는 엄마 대신 장에 가셨고, 우리는 늘 할머니를 기다렸다.
할머니가 사오는 간식은 다양했다. 어떤 날은 꽈배기, 사탕, 과자, 또 어떤 날은 사과, 귤, 배였다. 특히 과일을 사 오실 때면 버스 기사님이 할머니의 짐을 밖으로 내려 주셨다. 먹성 좋은 오 남매이다 보니 귤 한 상자를 사 오면 하루, 사과 한 상자를 사 오면 삼일을 못 갔기 때문에, 늘 몇 상자씩 사 오시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우리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좋아하셨다. 쟁반에 넘치도록 과일을 가지고 와서 먹어도 우리가 체할까 걱정하셨지 아깝다고 하시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그런 할머니였다.
수술하고 괜찮을 줄 알았지만, 여러 차례 고추밭에 농약을 뿌려도 살아나느 벌레처럼, 할머니의 몸 안에 그것들도 다시 살아났다.
할머니는 다시 병원으로 가셔야만 했다. 병을 고치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머니를 좀 더 세상에 붙들기 위해서 말이다. 병원으로 가시고 몇 달이 지나자 할머니에게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의식은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집에 머무르셨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뼈 빠지도록 번 돈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쓰이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그런 분이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할머니는 아버지가 찾아오실 때마다 ‘정희아배, 정희아배’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어느 날 할머니의 젊은 날을 맞바꾼 아버지를 할머니는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자신을 ‘누구요’라고 부른 날 우셨다.
침대 발치에서 서 계신 아버지를 보고, 할머니는 허공으로 손을 휘저으며 입을 떼셨다.
“누구요…. 뉘신대, 여기 있댜.”
그날 처음 아버지의 눈과 볼에서 투명하지만 보는 사람을 태워버리는 물을 보았다. 아버지는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무시고, 병실을 나가셨다. 그리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으셨다. 다시 보았을 때는 아버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장례식장으로 모시지 않으셨다. 큰아버지는 시골집으로 모시면 왔다 갔다 힘드니 병원 장례식장으로 모시자고 했다.
“형이, 뭐라고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할겨, 어머니 집으로 모실 거니까. 그렇게 알아. 내가 다 준비할 꺼고, 내가 다 할꺼니. 아무 말 말어.”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오셨다. 할머니는 병원을 들락거리신 이후로 늘 집에 오시면 집이 최고라고 하시며, 오래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다.
평생 한곳에 머무셨던 할머니, 뜨거운 날씨에도 볕에 달궈진 흙이 뜨끈해서 좋다는 할머니를 알기에 아버지는 병원 냄새 가득한 장례식장으로 모실 수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여전히 할머니 방으로 부르는 그곳으로 할머니를 모셨다.
할머니의 무덤은 대문을 나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우리 집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래 살기 싫다던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야, 오래 살기는 싫은디, 니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 쪼매난 것들은 보고 싶은디. 근디 오래 살지는 말아야 혀. 오래 살면 다 힘들어. 니 어매도, 아배도 힘들어.”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눈물 많은 여동생은 울고, 나는 화를 냈다. 그런데도 내 안에서 콕 박혀 있던 할머니는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