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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Nov 05. 2023

뭐 하고 싶어요?

*<당연해진 말들>은 프라하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겪은 일들을 글로 담은 시리즈입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말들을 생소한 눈으로 보는 학생들을 통해서, 한국어가 가진 특별한 점, 신기한 단어와 재미있는 표현들을 함께 공부한 자료이며, 말과 언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이 붙은 에세이입니다.


초급 한국어에는 정보 전달에 필수적인 문장이 많다. 주로 명사로 된 문장들이다. 저는 현주예요.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저는 선생님이에요. 학생이 아니에요. 이건 뭐예요? 양파예요. 이건 얼마예요? 삼천 원이에요. 이렇게 명사로 정보를 전달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본적인 동사의 활용을 연습한다. 뭐 해요? 일해요. 내일은 뭐 해요? 일하지 않아요. 쉬어요. 학생들은 이쯤에서 내가 누구이고 상대방은 누구인지, 내가 속한 이곳은 어디인지, 우리들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 교환이 가능해진다. 그다음 단계에서 배우는 새로운 문장은 '-고 싶다'이다.


뭐 먹고 싶어요?

저는 불고기를 먹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불고기를 먹을까요?


칠판에 예문을 쓰고 '고 싶어요'와 '을까요'에 빨간색으로 덧칠을 한다.


오늘은 '-고 싶다'를 배울 거예요. 우리는 식당에 가요. 음식을 먹어요. 이렇게 물어봐요. 뭐 먹고 싶어요? 저는 불고기를 먹고 싶어요. 뭐 먹고 싶어요? 저는 떡볶이를 먹고 싶어요. 우리는 지금 식당에 있어요. 엘사 씨, 뭐 먹고 싶어요? 


학생들과 번갈아 가며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체코 음식도 나왔다가 인도 음식도 나왔다가 일본 음식도 나왔다가 한국 음식도 나오는 시간이 지나간 후에 우리는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더 말해보기로 한다.


뭐 먹고 싶어요? 이야기했어요. 이것처럼 뭐 하고 싶어요? 물어보고 말할 수 있어요. 이제는 뭐 하고 싶어요? 인터뷰 영상을 볼 거예요. 여러분 버킷 리스트 알아요? 사람들이 말해요. 뭐 하고 싶어요.... 우리는 인터뷰를 보고 뭐 하고 싶은지 생각하고 쓸 거예요.


학생들과 같이 100명의 사람들이 답하는 버킷 리스트를 본다.


저는...으로 시작해서 뻗어나가는 사람들의 소망들. 죽기 전에 오로라를 보고 싶은 사람, 영국에서 축구를 직관하고 싶은 사람, 탱고를 배우고 싶은 사람, 지인들을 모두 초대해서 파티를 열고 싶은 사람, 바닷가의 전경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 해외 봉사를 가고 싶은 사람, 자신만의 콘서트를 열고 싶은 사람, 여자친구를 최소 5명은 사귀어 보고 싶은 사람,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은 사람, 스카이 다이빙이나 번지점프를 하고 싶은 사람...


학생들은 영상 속 사람들의 소망에 귀 기울이며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듣는다. 가끔 알아들은 단어들이 나오면 반가워하며 고개를 흔든다. 아..! 스카이다이빙! 남자친구! 파티!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의 소망은 그들에게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영상이 끝난 후에 다 같이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을/를 배우고 싶어요

-이/가 되고 싶어요

-에 가고 싶어요

-에서 살고 싶어요

-을/를 보고 싶어요


영상에 나온 문장들을 최대한 단순하게 바꾸어 칠판에 쓰고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예시를 참고해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게 했다. 


이제 버킷 리스트를 쓸 거예요. 여러분은 뭐 하고 싶어요? 지금은 15분이에요. 30분까지 써 주세요.


급격히 조용해진 교실과 종이에 고개를 파묻고선 버킷 리스트를 쓰는 학생들. 종이에 채워진 소망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무엇을 배우고 싶을까. 어디에 가고 싶을까. 누구를 보고 싶을까. 그 사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가 생각해 본다. 아주 어릴 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작가가 되고 싶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집에 가는 길 내내 나를 좇아오는 달이 환하고 밝아서, 그 모습이 신기해서 일기장에 시를 한 편 썼다. 제목은 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만큼 껑충 좇아오는 달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주 어릴 적이라 기억은 안 나지만 혼자인데도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묘한 기분을 담았던 것 같다. 조용히 밤 길을 걷는데 무섭지 않았던 날. 온 만물이 내 걸음을 함께 따라오는 것 같던 날. 달과 함께 산책을 하는 것 같은 밤. 그 마음을 글로 담는 동안 마음이 차분히 행복해졌다. 이렇게 조용한 행복을 취할 수 있다면 나는 작가가 되고 싶구나.


공상에 잠시 멍해질 찰나 학생이 손을 든다.


선생님. 이거 맞아요?


종이에 적힌 한글은 삐뚤빼뚤 하지만 힘주어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한 자 한 자 꾸욱 눌러 적은 문장은 '제게 사랑하고 싶어요'이다. '제게'를 '저를'으로 고쳐준다. 아마 체코어 문법상 내게 사랑을 주고 싶다는 표현이 더 익숙해서 그런가. 나에게 사랑을 주든, 나를 사랑하든 스스로의 존재를 사랑으로 채워가며 사는 것은 죽기 전에 해야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연히 버킷 리스트일 텐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중 하나였다. 그렇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여행을 가고 케이팝 가수를 만나고 번지 점프를 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 중 하나이지.


한편 맞은편 학생이 손을 들어서 질문을 한다.

선생님.


모르겠어요.


도저히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말과 답답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하고 싶으면 지금 하면 되지 왜 리스트를 써야 해요. 저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죽기 전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냥 지금 해요.


학생은 옆자리 친구가 엄마가 되고 싶다고 쓴 걸 한 번 흘겨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남자친구랑.... 


이 말을 듣던 다른 학생들이 자지러진다. 


맞은편에서 나를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 학생은 버킷 리스트 개념을 다시 설명해 준다.


그게 아니라. 죽기 전까지 기다린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뭐 하고 싶냐고. 지금 당장도 괜찮고 3년 뒤 아니면 5년 뒤도 괜찮고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나를 사랑하고 싶은 학생에게는 사랑할 시간을 설계하고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학생은 그런 과정의 생략이 중요하다. 쉬는 시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학생에게 삶은 너무나도 유한하다. 둘의 대화 끝에 지금 당장 할 것이든 미래에 하게 될 것이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적어 보자는 것에 의견이 모인다. 


차곡차곡 학생들의 소망이 적힌 원고지가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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