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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May 30. 2022

바람을 타는 민들레 홀씨처럼

얀과 함께 프라하에 있는 수목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수목원에는 다양한 나무와 꽃과 풀이 많았다. 그 식물들은 모두 지구 어딘가에서 자라왔던 것들이자 아직도 자라나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를 테면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라는 식물, 일본에서 가꿔진 분재, 중앙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꽃, 열대 우림에서 크는 축축한 나무들이 식물원에 모여 있었다. 그 식물들 사이를 손바닥만 한 나비가 날아다니며 꽃물을 마셨다가 꽃잎에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각기 다르게 푸르고 알록달록한 식물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생각을 옆에 있는 얀에게 물었다.


"너는 만약에 사람이 아니라 이런 식물로 태어났으면 뭐였을 거 같아?"


얀은 식물들을 보며 '글쎄'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게 되물었다.


"너는? 너는 식물로 태어났으면 뭐였을 거 같아?"


얀은 종종 내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되묻곤 한다. 그럼 나는 새삼 내가 한 질문이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음을 깨닫곤 역시 '글쎄'라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무슨 식물이었을까. 나는 꽃이었을까, 나무였을까, 풀이었을까, 열매를 맺는 식물이었을까, 색깔이 늘 푸른 식물이었까, 키가 큰 식물이었을까, 들판에 자라는 키가 작은 식물이었을까, 한참을 생각하다 바람에 떠도는 민들레 씨를 생각한다.


나는 아마 민들레, 그중에서도 가장 씨가 풍성한, 그 풍성한 씨를 가득 움켜쥐고 있는 단단한 민들레였을 것 같아. 나중에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 그렇게 말해야지 생각했다. 후로 길가에 핀 민들레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나였을지 모르는 혹은 지금의 나인지도 모르는 민들레들을 천천히 보고 씨를 후 불었다. 어떤 민들레는 미련 없이 헤어지는 연인처럼 씨를 부드럽게 날렸다. 그 씨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흩어졌다. 그런가 하면 어떤 민들레는 좀처럼 씨를 놓아주지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양볼 가득 숨을 불어넣고 한숨에 뱉어내어도 씨는 떨어지기는커녕 커다란 민들레의 머리가 아래로 휘청였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돌아왔다. 


민들레는 습기에 민감하여 축축한 날에는 낙하산 같은 씨앗들의 깃털을 접고 보송한 날에 그 깃털을 활짝 편다고 한다. 날기 좋은 날이 언제인지, 날개가 젖지 않는 날이 언제인지를 알고 날 준비를 하는 민들레 씨앗들은 참으로 현명하구나. 그걸 알기 전에는 어떤 민들레들은 꽤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씨앗을 날려 보내야 민들레의 생존에 유리한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씨를 놓지 않고 잡고 있다고. 민들레가 마치 나 같다고 생각한 것은 그 모습에서 나의 두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떤 출발은 무언가를 놓아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는 연인과의 만남이 아닌 헤어짐에서부터 시작하고 도전은 일의 시작이 아닌 포기에서부터 시작하고 강한 결심은 출발이 아닌 도착에서 다시금 피어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하던 때에... 바람에 쉽게 씨를 놓아주지 않고 움켜잡고 있는 민들레가 새로운 비행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래서였다. 


프라하에 와서 정착한 지 3년이 지나고 4년째가 되니 많은 것을 잡을 때보다 놓아주어야 할 때가 많았음을 실감한다. 한국에서부터 만났던 애인과의 이별이 있었고 자연스레 멀어진 친구들과 이곳에서 새롭게 연을 맺은 사람들, 열망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 시작한 일,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집을 떠나 최근에 이사한 집. 아마 민들레 홀씨처럼 나는 계속해서 비행하고 정착하고 열매를 맺고 다시 비행을 하는 삶을 영원히 계속해야겠구나. 그런 비행의 고난이 예견되면서도 쉽지 않은 인생이 재미있다는 (정확히는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다는) 어느 노랫말이 떠올랐다. 


이십 대의 후반에 접어드니 많은 친구들이 제각기 홀씨를 날리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초중고를 안전히 졸업하고 대학교에 올라 이름 있는 기업에서 일하는 모범적인 인생의 길을 벗어나 자신의 씨앗을 뿌리려고 민들레를 힘차게 부는 친구들이 점차 늘고 있다. 내가 애정 하는 은은 돌연 호주로 떠나겠다고 말해 마음을 놀라게 했는데 그도 잠시 호주에서 누구보다 밝게 지낼 것이 선명하게 그려져 안심이 되었다. 은이 자신을 믿는 것보다도 더 믿는다면 징그러운 고백이지만 은의 생명력은 강하기에 조만간 호주에서 익살스럽게 지내고 있는 사진이 오겠다고 생각했다. 진은 쿠키를 만드는 가게를 차린다고 했다. 이제 막 간판을 달았다. 모두가 대학을 갈 때 가지 않더니 어느 날 모두가 졸업할 때 갑자기 대학을 간다고 소식을 전한 친구다. 진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결정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듯한데 그걸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모두가 가지 않는 길을 춤추며 걷는 사람은 누구인가.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며 풍경을 즐기는 이는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진인 것 같다.


이제 보니 민들레는 나만의 꽃이 아니구나. 날아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훨훨 비행을 하는 현명한 민들레는 우리의 친구들. 두려워서 씨앗을 꼭 움켜쥐고 있어도 그것은 어느 때의 나와 우리들. 결국에는 크게 부는 바람에 거침없이 흔들리며 비행하는 미래의 어느 날. 그 모든 것이구나. 바람을 타는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라 친구들이여.


길을 가던 민들레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 굳이 내가 힘주어 불지 않아도 제 때를 찾아 씨를 날릴 그 꽃을 가만가만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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